오지 않는 영국의 여름을 기다리다 지친 자의 영국 여행 옷차림 팁
5월에 영국에 살러 왔다. 지난 겨울에도 3달 무비자 방문 가능 기간을 거의 최대치로 써서 영국에 있었다. 영국을 사랑해서는 아니고 다른 사정이 있는데 아무튼간.
영국은 위도가 높아서 겨울에는 해가 거의 없었다. 정오에도 해가 머리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비스듬히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할 뿐이다.
대신 여름에는 하루가 길다. 5월에 저녁 아홉 시경 황금빛으로 물드는 세상을 보면서 매일같이 충격을 받았다. 밤 열 시에도 아직 푸른 기운이 가시지 않은 창가에서 양치질을 하다가 깜짝 놀라서 바깥으로 뛰쳐나간 적도 있다.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해가 길다면, 혹서기에 무척 덥겠군!
...결론부터 말하자면, 혹서기는 없다. 나는 날씨에 민감하고, 사전 조사가 꼼꼼한 편이다. 평균 최저기온, 평균 최고기온, 평균 평균기온(?), 사상 최저기온, 사상 최대기온, 햇빛 있는 날, 비오는 날, 연간 강수량 등이 빼곡히 적힌 표를 펼쳐놓고 각 도시들의 기후를 비교하는 취미도 있다. 물론 영국의 기후도 실컷 조사했다. 여름이 덜 덥고, 겨울이 덜 춥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다.
지난 겨울에 현실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런던. 낮에는 반바지를 입고 조깅을 나갔다. 저녁에는 할랄 한국 음식점에 걸어갔는데, 코디는 면 티셔츠 한장, 청바지, 울 혼방 코트였다. 그거 입고 가다가 너무 더워서 코트를 벗어서 팔에 걸고도 너무 더워서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한국에서는 얼어 죽을 각오로 코트를 입는데, 여기서는 덥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내가 지금 캘리포니아도 아니고, 방콕도 아닌데! 엄연한 겨울인데!
길거리 크리스마스 장식의 눈송이들이 다 이상하게 보였다. 눈은 죽어도 절대 안 올 것 같은데 어째서 눈송이 장식이 있는 거지.
조사에 의하면 가장 더운 달은 7월이다. 지금이다. 7월에 가죽 재킷을 입고 다녔으면 말 다한 것 아닌가? 한 여름에도 삼복처럼 미친 듯이 덥지나 않겠거니 했지, 가죽 재킷을 입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해 봤다. 그래놓고 이걸 여름이라고 부르다니. 에딘버러에 나가있는 특파원(아님)은 너무 추웠다고 한다. 너무 춥다고. 여름이 추우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여름은 살짝 덥거나 많이 더운 계절이 아닐까? 이걸 여름이라고 불러도 되나? Summer 라는 명사 하나를 이렇게나 다른 계절에 똑같이 사용하는 건 언어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한 일주일 비오고 흐리고 춥다가, 오늘은 좀 맑아서 친구를 만났다. (맛없고 비싼) 버블티를 사서 야외 벤치에 앉았다. 런던에서 나고 자란 친구가 물었다.
친구: 영국의 여름은 아직 안 겪어 봤어?
율: 응, 아직이야. 아직 안 온 거지? 우리 아직 여름 기다리고 있지?
친구: 지금이 여름이야. 이틀 덥고, 10일동안 비가 와!
율: 그럼 언제 맑아...?
친구: 구름이 없어지면 맑지 ㅇㅅㅇ?
율: ..^^..?
잠시 후,
친구: (반팔 입고 있음) 좀 쌀쌀하다. 펍 갈까?
율: (긴팔 위에 바람막이 착용) 그러자. 갑자기 춥네!
2024년 여름 휴가에 피서지를 찾는다면 런던도 좋다. 더운 날도 있고 비오는 날도 있지만, 한국보다는 시원하고 비도 덜 온다. 모기도 별로 없다. 다만 여름 영국 여행 옷차림 팁을 드리고 싶다. 세상에 영국 여행 코디 팁 이미 많은 거 알지만, 또 드리고 싶다. 나도 그거 다 읽었는데 너무 상상 이상이었다. 짐 챙길 때 <여름>이라는 생각을 약간 버려야 한다. 자외선이랑 모기 막아 주는 여름용 겉옷 말고 진짜 외투 필요하다. 스코틀랜드나 북쪽도 들를 예정이라면 더더욱 트렌치코트 수준으로 제대로 된 봄가을 외투 필요하다. 비 막아 주는 등산용 비옷이면 더욱 효과적이다. 그렇게까지 하기는 더운 날을 대비하여 긴팔 티도 필요하다. 운 좋게 더운 날이 여행 일정에 겹칠 수 있으니 민소매도 뭐 가져오면 입을 날이 있을 수도...
집에서 나갈 때 "어머, 날씨가 따사롭고 맑네. 오늘은 가볍게 나가야지!" 해선 안 된다. 날씨는 더웠다가도 곧 추워진다. 맑았다가도 비가 온다. 오늘도 낮에 따뜻했는데 5시 되자마자 추웠다.
굳이 여름 옷 겨울 옷 갈라서 따로 보관해 놓을 필요가 없는 나라다. 옷도 신발도 좀 덜 다양하게 갖고 있어도 될 것 같다. 봄가을 옷 + 겨울 코트, 패딩만 있으면 되니 돈도 공간도 절약된다. 여태껏 얼마나 다양한 기후에 대비하며 살았는지 깨닫는 중이다. 콸콸 쏟아지는 장마철엔 비옷, 장화, 겨울엔 코트부터 구스다운 패딩, 히트텍, 여름엔 쿨드라이, 린넨 옷, 샌들, 냉장고 바지, 봄가을엔 예쁜 옷, 강렬한 자외선도 막아야 하니까 UV컷 재킷도 있어야 하지(영국은 심지어 자외선 지수도 낮다.) 정말 피곤했다. 한국인들 기특하다. 그러니까 여름 휴가 화이팅(?)
커버 사진 크레딧: Unsplash - Sabrina Mazz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