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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율 Feb 27. 2023

고기능 자폐스펙트럼 여성,
아스퍼걸Girl 공감 특징

#집착 #백수 #연기 #모방 #학교폭력 #원칙

'아스퍼걸Aspergirls'은 아스퍼거 증후군의 '아스퍼'에 여자를 뜻하는 'Girl'을 붙인 위트있는 단어이자 책 제목이다. 영미 성인 자폐 여성 당사자 커뮤니티에서 많이들 추천하는 책이었다. 내가 자폐스펙트럼에 집착하던 2020년 8월에는 국내에 번역서가 나와있지 않았으나, 그해 11월에 번역서로 출간되었다. 여성이 아닌 나의 반려인도 여성적인 표현형이기 때문에 공감 가는 부분이 꽤 있다고 했다.


서평은 아니고 그냥 내 인생 되돌아 보기 시간을 가져 볼까 한다. 내가 아스퍼걸인지 아닌지 여전히 모르겠으나(이전 글 내가 자폐여성일 수 있는 이유 5 참조)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진단이야 있으나 없으나 딱히 상관없고, 나 자신의 독특함을 수용하며 앞으로의 인생을 잘 설계해 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그래서 몇가지 공감 포인트를 짚어 보았다. 아래의 내용에 어느정도 공감한다면 일독을 권장한다.




공감 1.
'장애'가 줄어들 수록 '능력'도 줄어든다.

자폐스펙트럼은 인생을 어렵게 하기도 하지만, 특별한 재능을 주기도 한다. 서번트 증후군(예: 우영우)처럼 엄청난 지식을 줄줄 꿰는 영재적 능력이 아니더라도 평균적인 타인보다 조금씩 잘하는 능력들 말이다. 나 역시 집착에 가까운 집중력과 정보 흡수력을 갖고 있다. 모방, 관찰, 아침부터 밤까지 한 가지만 생각하는 집중력, 독학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응용하는 능력, 섬세하고 예민하게 느끼는 능력 같은 것들이다. 최근 2년 정도는 인간의 다채로운 정신상태와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내 초집중 관심사였다. 사람들과 더 어울리고, 유연한 사고 방식을 갖기 위해 애썼는데 그 과정에서 나의 특별한 재능과 감수성이 메말라감을 느끼고 있다. 적응 능력을 많이 발달시킨 중년 아스퍼걸들이 자주 이런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둘 다를 갖기는 어려운 듯하다. 자신에게 맞는 균형점을 찾아서 선택해야 한다.


공감 2.
몰입할 것이 없으면 공허하다.

인생에 단 한 순간이라도 집착 대상이 없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아침부터 밤까지 집착적으로 알아내고 싶은 그 무엇이 없으면 인생이 공허하고 지루하고 우울하고 무력하기까지 하다. 인간의 정신상태와 감정에 집착하기를 2년쯤 하자 이제 슬슬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줄어들고 질리기 시작한다. 나이가 들면서 새롭게 느껴지는 것들도 줄어든다. 이제 무엇에 집착하면 좋은가! 집착하고 싶다! 어릴 적부터 짝사랑 상대, 판타지 세계관, 내 소설, 무슨 프로젝트, 좋아하는 감독, 좋아하는 배우 등 주기적으로 집착 대상을 바꿔가며 잘도 집착했던 것 같다.


공감 3.
섹스를 정말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나는 싫어하는 쪽이다. 손 잡는 것은 싫다. 키스도 자주 하기는 싫다. 안는 것은 좋다. 이게 참 곤란하다. 무슨 트라우마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섹스를 너무 좋아하는 쪽보다는 너무 싫어하는 편이 위험 부담도 적고, 시간도 많을 수 있으나... 연애와 사랑은 원하기 때문에 나의 이런 점이 얼마나 매력 없을지 불안해 하는 것은 괴롭다. 상대방을 불만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섹스가 이해 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해할 것이 없고 그냥 좋아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겠지.


공감 4.
약물에 상당히 예민하다.

아스퍼걸들은 흔히 다른 정신과 질환을 갖고 있거나 오진 받는 일이 많다. 그래서 정신과 약을 먹는데, 그로 인해 더욱 사태가 악화되는 일도 왕왕 있나 보다. 본문 중에 아스퍼걸들은 일반적인 치료용량의 반토막을 최대치로 잡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문구가 나온다. 나역시 초등학생도 안 먹을 법한 최소용량, 반의 반토막 용량을 복용하고 있다. 카페인과 알코올에도 예민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카페인에 예민해서 저울에 그램수를 재서 복용(?)하곤 했으나 점차 복용량(?)을 늘려서 하루 커피 한잔(에스프레소 1샷)은 마실 수 있게 됐다.


공감 5.
학교폭력 피해자이다.

나는 운 좋게 신체적 폭력과 직접적 언어 폭력 등은 피했으나 13-14살 때 은따를 당했다. 은따를 당한 이유... 바로바로 이상하게 행동해서다. 딱히 뭐 남에게 폐를 끼친 것도 아니고, 뭐라 꼬집어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냥 남들이 안 하는 걸 많이 했다. 눈치도 안 보고, 남들의 눈빛이나 감정적 신호에도 극도로 무뎌서 행복했는데... 그 이후로는 언제나 항상 이상하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갖고 산다. 내 있는 그대로는 절대 보여서는 안 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공감 6.
성역할, 모성에 불편감을 느낀다.

이런 것까지 공감돼서 이상했다. 연애 성역할은 늘상 남자 쪽이 안 답답해서 좋겠다고 부러워 했다. 그래서 그거는 그냥 내 맘대로 하고 산다. 지금은 그냥 잘 받아들이는데, 20대 때에는 한창 가슴을 평평하게 하고 난소를 다 떼어내고 싶었다. 임신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몸이 이질적으로 느껴졌고, 가슴이 있는 것도 귀찮고 짜증나고 뭔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자녀를 낳고자 하는 욕망은 단 한번도 가진 적 없다. 물론 다들 그렇지는 않기 때문에 아이를 좋아하는 자폐 여성들은 출산, 육아 잘 하면서 산다.


공감 7.
꾸미지 않은 편안한 스타일을 선호한다.

근데 이거 이해 안 된다. 꾸미는 걸 선호하는 사람도 있나? 사회생활에 필요해서 억지로 하는 것 아닌가? 한창 패션과 스타일, 화장품에 흥미를 갖던 시기가 있었다. 내 경제적 사정으로는 완벽에 다다를 수 없다는 걸 깨닫자 지겨워졌다. 꾸밈을 좋아할 때도 특수한 날에만 꾸몄지 매일매일 화장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요즘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러 가거나 불특정 다수가 많은 장소에 사교활동을 하러 가면 화장하고 예쁘고 불편한 옷을 입는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후줄근하다. 쿠션으로 대충 얼굴 때리고 틴트 바르는 수준의 화장도 안 하고, 청바지는 커녕 파자마급으로 편한 옷만 입는다. 주중과 주말(매주 주말도 아니다) 온도차가 상당하다. 정말 상당하다...


공감 8.
기쁠 때 펄쩍펄쩍 뛰는 등 어린아이처럼 행동한다.

사실 안 그러는 사람이 있다는 게 더 이상하다. 바깥에선 잘 안 그러는데, 집에서는 뭔가 기분이 좋으면 폴짝폴짝 뛴다. 높은 곳(ex 소파 등받이 위, 카운터 위 등)에 기어 올라가기도 한다. 기쁨을 표현하는 방식이 상당히 원초적이다. 남이 시끄러운 건 싫어하지만 나 자신은 집에서 상당히 시끄럽고 정신없다. 가족들은 내가 뭘 하든 이제 이상하게 보지도 않고 그냥 무시한다. 남들은 기쁠 때 안 그러나? 기분 좋을 때 안 그러나?! 진짜?? 그냥 다들 집에서 그러는 거 아니었나???? 편안한 사람(ex 가족, 애인)과 있을 때 폴짝폴짝 뛰거나 바보같은 걸음걸이로 걷거나 갑자기 노래하거나 그러지 않느냐고. 집에 있을 때 귀여운 솜인형이 손에 잡히면 인형극 하지 않느냐고!


공감 9.
모방에 능하다. 사교적이어 보이나 연기하는 것이다. 정체성이 흐릿하다.

그렇다. 이런 말 하면 흔히 "누구나 사회적 가면과 페르소나를 사용하는 게 당연하지"라고 하던데, 나는 그 말 잘 못 믿겠다. 관찰 결과, 다들 그렇다는 게 사용하는 어휘나 바디랭귀지가 좀더 닫혀있고 열려있고 정도의 차이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완전히 다른 인간인 것처럼 방어막을 올리고 나를 꽁꽁 숨기는 것은 평균 이상으로 연기하는 수준이라고 느낀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새로운 환경에 가서 새로운 사회에 노출되면 항상 남들을 자세히 관찰해서 모방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상상도 못한 이유로 미움을 사고, 정보나 네트워크에서 소외될 것 같기 때문이다. 옷차림도 주중/주말 갭이 큰 것처럼 상대나 상황에 따라 내 모습도 갭이 큰 것 같다. 특히 10대~20대 때는 더욱 그랬다. 반려인이 나를 굉장히 사교적인 사람으로 생각해서 내가 그의 친구들을 만나기 싫어서 무섭다고 할 때, 거짓말 한다고 오해했다. 나이 들면서 조금씩 내가 가장 편안한 범위 내로 갭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공감 9.
고학력이더라도 백수 상태가 길며, 진로에 열정적이다가 금세 식어버린다.

할말이 없네... 많이들 그러시다니 위안이 될 뿐. 한국 기준 딱히 고학력 아닌데, 아스퍼걸이 미국이든 영국 책인지라 학사 혹은 그 이상이라는 의미인 것 같다. 공부는 좋고, 기술을 배우는 것도 좋고, 노동도 보람차다고 생각한다. 근데 '직장샐활'이나 프리랜서일 때라도 사람 상대하는 게 정말 싫다. 직장 싫어하는 이유: 타인과 너무 오랫동안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싫어서. 아침마다 사회에 걸맞는 단장(샤워, 브래지어 입기)을 해야 해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중요시 하고, 중요한 일을 등한시 해야 해서.


공감 10.
잘 속는다.

누군가의 말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나 안 맞나 잘 따질 수 있는데, 사실관계를 따지기 어려운 상황에서 쉽게 속는다. 상대가 설명하지 않은 예외를 상상해 주는 능력도 뛰어나다. 거짓말이거나 솔직할 용기가 모자라서 돌려 말하는 전형적인 레토릭을 진심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도 저게 헛소리일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인지하는데, 그냥... 사람이 직접 나한테 호소하니까 거짓말이 아닐 것 같다.. 대표적인 예로 "내가 정말 바빠서 만날 수가 없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공감 11.
높은 수준의 윤리적 원칙을 갖고 있으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괴로워 한다.

본문의 예시는 교육에 열정이 있어서 선생님이 되었는데, 교육 현장의 실상은 진실한 교육과 상관이 없어서 너무 마음이 힘들었다는 종류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역시 그렇다. 직장 관두는 이유 and 특정한 직종에 관심이 생겼다가 갑자기 하기 싫어지는 이유 TOP 3 중 하나다. 가급적 좋은 의도와 사회적 책임감을 갖춘 필드/조직에서 일하고자 하지만 그런 곳도 일상적인 업무에서 원칙을 모두 따르지는 않는다. 그럴 때 상당히 괴로워진다. 대형 프랜차이즈카페에서 일하던 시절 '우유 사랑 캠페인'이라는 게 있었다. 나는 유제품의 잔혹성을 생각하고 있으므로 괴로웠다. 매일 우유를 파는 것도 괴로웠는데, 우유 사랑 캠페인 중이라서 라떼를 주문하면 사이즈를 더 큰 걸로 해 준다는 말을 내가 해야 한다니... 이건 하나의 예이고, 모든 직장에서 다 그랬던 것 같다. 내가 하는 일은 사회에 해를 끼치는가, 를 가만히 생각하면 늘 사회에 해를 끼치고 있었던 것 같다.


공감 12.
본능적으로 동족(아스퍼거, 자폐스펙트럼, 신경다양인)과 어울린다.

내 반려인은 완전 투명한 사람이다. 세상에 이만큼 행동과 말이 정확히 일치하는 사람은 아직 내 반려인 밖에 못 봤다. 처음 만난 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단 한번도 연기를 한 적이 없다. 그는 연기를 '할 수 없어서' 안 한다고 한다. 나한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한테 연기를 잘 못한다. 그도 신경다양인이다. 모든 것이 예측가능하고, 투명하고, 거짓말을 진짜 정말 너무 못한다. 변화를 싫어해서 스스로도 변화하지 않는다. 굉장히 사랑했던 전애인 역시 "지나치게 솔직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 모두 한 번 자신의 바운더리에 들인 사람은 영원히 사랑하고, 나에게 팩트를 말해 주는 걸 상당히 좋아한다. 희한하게도 둘다 어린 시절에 선택적 함구증이 있었다. 나는 자폐적인 특성을 어느정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동족처럼 생각한다.

사족. 다만 나와 상대 양쪽 다 예민해지는 트리거가 많으면 같이 어울려 놀기가 굉장히 힘들다. 그건 또 안타까운 문제다. 나는 아주 극도로 솔직한 사람은 정말 정말 좋아하고, 웬만해서는 상처 받지 않는다. 자기가 옳다고 느낄 때까지는 입 발린 말 한 마디 안 해도 되고, 눈맞춤도 안 해도 되고, 표정 없어도 된다. 근데 많이 움직이고 소리 내는 습관이 있거나 왔다갔다 하면 정신사나워서 못 견딜 것 같다. 


이외에도 당연한 것(소리에 예민, 주변 환경 통제, 경직된 사고방식, 내 방의 모든 물건 베이지색...)들 공감 했고, 한편으로는 공감되지 않는 부분들(선택적 함구증 등)도 꽤 있었다. 겉으로는 학습 지능과 자조기능이 높아 보이기 때문에 배려 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높은 수준의 사회적 기술을 기대 받는 점은 많은 여성이 공감할 것 같다. 그간 위와 같은 특성들을 고쳐야 할 이상한 점으로 여겨왔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 받아들이고 내게 편안한 쪽으로 인생을 설계해 볼까 한다. 다시 한번 내 만트라인 "나도 남들 만큼 잘났다."로 마무리한다. 아스퍼걸도 남들 만큼 잘났다.




생각이 많아서 인생 살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렇다면 글이라도 많이 쓰려고요. 누구나 생각에 시간을 쏟아붓지는 않기 때문에, 저의 결과물들이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깨달음이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을 흥미롭게 보셨다면 구독하고 종종 읽어 주세요.

선율 / 인스타그램 / 트위터 / sunyoo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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