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겉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서른 살을 먹을 때까지 내가 자폐인일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나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척, 파트너들, 12명의 학교 선생님, 3명의 상담사, 2명의 정신과 의사, 그 누구도 그런 가능성을 고려해 본 적 없는 듯 했다. 내가 20대 중반에 정신 장애와 신경다양성에 관심을 가지고 당사자의 경험담을 수집할 때도 자폐는 완전한 남의 이야기였다. 온갖 성격장애를 들여다 보며 '혹시 내가...?' 하는 생각도 많이 해 봤다. 환시 같은 시그니처(?) 증상이 전혀 없으면서 혹시 몰라 조현병까지 진지하게 들여다 봤다. 이쯤이면 건강염려증일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이르렀는데도 자폐 만큼은 고려하지 않았다.
2020년 여름, 코로나 확진자가 갑자기 100명을 넘어서며 집 안에 처박히기 시작할 무렵, 나는 유투브 알고리즘의 가호를 받아 성인기에 진단을 받은 영미권 여성 자폐인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진단을 받지 않고 살아온, 즉 눈에 띄지 않는 자폐를 가진 사람들의 경험담이 꽤나 공감됐다. 자폐 자가 진단 퀴즈(AQ Test)들을 잔뜩 찾아서 풀었다. 점수가 많이 높지는 않았지만 '자폐인일 확률이 았다'거나 '전문가의 진단을 받아 볼 만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아침에 눈 뜨고부터 밤에 자기 전까지 자폐에 집착하기를 1주일 이상 지속했다. 이전에 내가 자폐에 관해 알고 있던 것 중의 상당수가 편견이었음을 발견했다.
2013년 이전에 DSM-4 진단매뉴얼에서 아스퍼거 장애, 자폐증, 상세 불명 전반적 발달장애로 따로따로 진단되었던 병들이 DSM-5 진단매뉴얼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는 한 진단명으로 통합되었다. 자폐인이라고 하면 이 스펙트럼 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통칭하며, 이 사람들은 다양한 지능, 다양한 언어 능력, 다양한 관심사, 다양한 성격, 외모, 관심사, 특기 및 어려움을 갖고 있다. 자폐의 다양한 측면 가운데 표정을 읽는 게 가장 어려운 자폐인도 있고, 표정을 잘 읽지만 다른 측면을 어려워하는 자폐인도 있다. 감각처리가 어려운 어떤 자폐인은 촉각에 매우 예민할 수도 있고, 어떤 자폐인은 촉각에 너무 무뎌서 추운지 더운지도 못 느낄 수 있다.
특히 지능발달지연이 없는 자폐인(DSM-4 기준 '아스퍼거 증후군'에 해당한다)들은 <평범>해 보이기 위한 전략인 마스킹(masking, 가면 쓰기, 가리기)을 어릴 때부터 익히는 경우가 많다. 그걸 잘하게 되면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어떤 자폐인들은 마스킹을 할 필요를 못 느꼈거나, 잘할 수 없어서 더 눈에 띈다. 자폐인을 모아놓으면 각자 각양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다. DSM-5 에서는 살아가는 데 보조가 필요한 정도에 따라 level 1, 2, 3 을 나눠 진단하도록 되어 있다 (ASD Comparison).
게다가 최신판인 DSM-5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 진단 기준에 전 버전엔 없었던 구문이 새로 생겼다. 증상이 "현재 혹은 과거에" 있었는가 하는 구문들이다. "과거"가 추가됐다는 게 포인트다.
난 말을 일찍 뗐다. 그러니까 결코 내가 자폐일리 없다고 믿었다. 돌 잔치 때 이미 간단한 단어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집안의 어른들은 나를 보고 변호사가 났다고 신나하셨다며 (그런데 이런 어른으로 자랄 줄은 몰랐다는 뉘앙스로) 그 호시절을 기억했다. 나는 자폐인들은 어릴 때 말을 늦게 떼고, 언어 장애가 있기도 하며, 언어보다 이미지와 숫자에 강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43세에 진단을 받은 자폐인이자, 자폐 관련 작가/코치/연사인 사라 헨드릭스는 강연에서 그가 어릴 때 말을 일찍 시작했으며, 그런 자폐인들도 많이 있다고 했다(Girls and Women and Autism - What's the difference?). 언어장애를 같이 갖고 있는 자폐인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자폐인도 많다. 말이 거의 없거나 말을 못하는 자폐인도 있지만, 부적절할 정도로 말이 많은 자폐인도 있다.
난 자폐인들은 틱이나, 자발적이고 반복적인 자기자극행동(self-stim)을 항상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 앞에서는 감출 수 있어도 혼자 있을 때는 자기자극행동을 반드시 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나는 혼자 있을 때 무의미한 소리를 내거나, 팔을 털거나, 일어나서 걸어다니는 등의 전형적인 자기자극행동을 전혀 하지 않으니까 역시 자폐일리가 결코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자폐스펙트럼으로 진단하기 위해 필수적 항목은 사실 아니다. <다음의 네 가지 증상 중 두 가지 이상의 증상이 있어야 한다> 항목 중 하나에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눈에 띄는 자기자극행동을 하지 않는 자폐인도 있다는 뜻이다. 바로 위에 언급한 Sarah Hendrix의 강연 영상은 1시간이 넘는데, 전체를 정주행 하는 동안 나는 그가 특별히 어떤 움직임을 반복한다는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다.
게다가 자기자극행동이 반드시 몸을 흔들거나 터는 형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자폐인 당사자들의 증언이 인터넷에 가득했다. 자기자극행동은 감각 중 뭔가를 자극하는 모든 행동을 뜻한다.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펜을 굴리는 등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없는 사람도 별 이유 없이 자기자극행동을 하며, 비자폐인들이 하는 것처럼 <평범>해 보이는 자기자극행동만을 하는 자폐인들도 있다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자폐를 가진 여자 아이들은 신경전형적인neurotypical*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친구 관계를 원한다고 한다. 자폐를 가진 남자 아이들은 평균적으로 신경전형적인 또래보다 친구 사귀기에 관심을 덜 가졌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 자폐인들이 사람과의 교류나 사랑, 우정, 신뢰 등을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해 받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에서 피로를 느끼기도 하고, 인간 관계보다 더 재미있는 관심사에 푹 빠지는 성향이 있어 외로움을 많이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신경전형적: 신경 발달이 전형적인. 신경발달장애가 없는.
미디어에 재현되는 자폐인들은 다채롭지 않다. '빅뱅이론'의 셸든, '더 굿 닥터'의 숀 머피, '별나도 괜찮아Atypical'의 샘 같은 고기능 자폐*인들은 좋아하는 분야의 특출난 능력이 있고, 표정과 억양이 단조롭고, 타인의 지속적인 거절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을 때나 남과 있을 때나 똑같이 행동한다. 지능발달지연을 동반하는 자폐인들은 위의 특성을 갖고 있는 동시에 순박하고 착해서 감동을 주는 존재이거나, 다른 주인공의 책임감을 돋보이는 플롯 장치로 사용된다. 무엇보다 자폐인은 언제나 남성의 모습이다.
*고기능 자폐: IQ가 평균이거나 그 이상이면서 자폐 스펙트럼에 속해 있음. 일상생활을 스스로 영위할 수 있는 정도의 '기능'을 한다는 의미. 영미권 당사자 커뮤니티에서는 이 단어가 비자폐인의 잣대와 시각으로 만들어진 말이며 당사자들의 경험을 소외시킨다는 의견이 자주 보인다.
예전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10배 더 자주 자폐 진단을 받는다는 통계가 등장하곤 했는데, 여성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자폐 표현형에 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점점 그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 유전 요인과 더불어 사회적 성 역할에 따라 여자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더 많은 공감을 요구하는 교육, 또 여성이 자폐일리 없다는 의료 현장의 편견 그 자체 등등이 성별 차이를 빚는다고 한다(Sex Differences in autism). 성차를 차치하고도 자폐인은 꽤나 흔하다. 미국의 통계인데다 서류상 성별 기준이기는 하지만, 여성은 189명 중 1명 남성은 49명 중 1명이 자폐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인 200명 중 1명 정도가 정씨이다. 정씨를 만나는 것만큼 자폐 여성을 흔히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진단을 받지 않은 자폐 여성이 많을 가능성을 감안하면 정씨 인구 보다 자폐 여성이 더 흔할 수 있다(성씨 본관별 인구).
사실 나도 모른다. 영원히 알 수 없을지 모른다. 내가 2021년에 12살이면 진단을 받을 수도 있는데, 내가 지금 서른 한 살이고, 마스킹 너무 잘했고, 또 책을 읽을 때나 영화를 볼 때나 항상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분석하고 옆사람에게 물어 봐서 인간관계 천재(?)가 될 수 있었다. 한때 진단기준에 맞았다고 하더라도 이제 와서 과거의 나를 진단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는 정신과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넌지시 말을 꺼내 본 적이 있다. '요즘은 자폐 여성에 관한 정보를 많이 찾아 봤는데 공감이 되어서 저도 해당이 되는지 궁금했어요.' 답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예상했듯이 '자폐요? 율씨 본인이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였다. 아무것도 물어 보지 않고, 검토해 보지 않고.
비전형적인 자폐 표현형에 이해가 깊고, 나를 진지하게 검토해 주는 전문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리 누가 "율 씨는 절대 자폐일 수 없다"고 해도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려면 많은 공을 들이고 발품을 팔아야 할 텐데, 어차피 자폐는 치료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진단을 받는다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 이런 형편(?)이라 영미권의 성인 자폐인 커뮤니티, 특히 지능 발달지연이 없는 자폐인(편의상 '아스퍼거'에서 따와서 '아스피'라고들 부른다. 국내에선 '아스'라고들 하는 것 같다. 개인적인 경험상 국내 커뮤니티는 주로 아스퍼거 자녀를 둔 부모 혹은 배우자 커뮤니티가 더 활성화 되어있다는 느낌이었다.) 커뮤니티에서는 공식 진단이 없다고 배척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국내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몰라서 모르겠다.
끝맺음이 어정쩡 하다. 이 글은 내가 불평을 토로하기 위해서 쓴 것은 아니고, 어린/젊은 자폐 여성이나 마스킹을 잘하지 못하는 자폐 여성들이 진단과 보조를 받기를 바라면서 썼다. 내가 자폐스펙트럼의 진단기준에 맞지 않았다고 해도 나처럼 아무런 검토를 받지 않고 진단 받기를 실패하는 다른 여성 자폐인은 있을 테니까. 또 스펙트럼의 "고기능" 즈음에 있는 여성들이 자신을 수용하고 용서하기를 바란다. 나 역시 진단이 있든 없든 나의 신경다양인적인 면모를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싶다.
생각이 많아서 인생 살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렇다면 글이라도 많이 쓰려고요. 누구나 생각에 시간을 쏟아 붓지는 않기 때문에, 저의 결과물들이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깨달음이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을 흥미롭게 보셨다면 구독하고 종종 읽어 주세요.
선율 /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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