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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항현 Jul 18. 2020

"그것도 물리냐?"

“그것도 물리냐?”라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처음 받아본 것은 아마도 물리학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나서였던 것 같다. 내 석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좁은 세상 연결망 위에서 모래쌓기”다. 좁은 세상 연결망은 1998년 <네이처> 논문에 소개된 연결망 모형의 이름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상 참 좁다”고 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그 다음해인 1999년에는 <사이언스> 논문에 연결망에서 발견되는 허브(hub)를 설명하기 위해 척도 없는 연결망 모형이 제시되었으며, 앞 논문과 함께 이른바 복잡연결망(complex network) 분야를 탄생시켰다. 이 분야의 연구대상은 연결망으로 기술될 수 있는 모든 현상이며 사회, 생물, 기술 등 영역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사이언스> 논문은 물리학자들이 썼고 이후에도 물리학자들이 이 분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해오고 있다.


다른 배경을 가진 물리학자들에게 복잡연결망 분야는 물리학의 전통적인 정의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물리학에서 발전된 개념과 방법론이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거꾸로 복잡연결망 분야가 물리학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한다는 면에서 이 분야를 굳이 물리학에서 제외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새로운 분야가 물리학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실제로 수학, 전산학, 사회과학 등 다양한 분과의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있고 더 일반적으로 연결망 과학(network science)으로 부르기도 한다. 물론 수학의 그래프이론과 사회학의 사회연결망이론 등 기존의 연결망 연구가 있었기에 이 새로운 분야가 발전할 수 있었다.


나도 석사과정 때 시작하여 지금까지 꾸준히 복잡연결망 연구를 하고 있는데 내 관심사는 굳이 말하자면 연결망 그 자체보다는 복잡계를 이해하는 방법론으로서의 연결망이다. 복잡계 연구란 계를 이루는 수많은 구성요소가 상호작용하여 거시적인 패턴을 발현시키는 경우 거시적 결과를 미시적 원인으로부터 이해하고자 하는 접근방식을 가리킨다. 구성요소 사이의 상호작용 구조를 연결망으로 표현할 경우 연결망 구조가 거시적 패턴의 발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가 주요한 질문 중 하나다. 그렇다보니 물리학 내에서도 주로 나와 같은 통계물리학자들이 복잡계와 연결망을 많이 연구해왔다. 나의 경우 모래알들이 연결망 위에서 옮겨 다니면서 크고 작은 모래 사태를 일으키게 되는데 그러한 사태의 통계적 특징이 연결망 구조에 의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석사과정 동안 연구했다.


21세기의 첫 20년 동안 연결망 과학이 활발히 연구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데이터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의해 가능해졌다. 내가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했던 핀란드 알토대학교 복잡계연구그룹에서는 유럽의 한 통신사로부터 받은 익명 처리된 대규모 핸드폰 통화데이터를 분석하여 수많은 연구성과를 냈다. 이 데이터에는 누가 누구와 통화를 했는지 뿐 아니라 언제 얼마나 오랫동안 통화를 했는지까지 초 단위로 매우 자세한 정보가 주어져 있다. 물론 통화내용은 없다. 나도 이 데이터를 동적연결망(temporal network)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으로 분석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동적연결망은 연결망 구조에 시간축을 더한 것인데, 연결망의 시계열 또는 시계열의 연결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핸드폰 통화도 인간의 활동이기에 밤과 낮, 주중과 주말의 패턴이 다르다. 나는 공동연구자들과 이런 주기적 성질에도 불구하고 통화 패턴이 불규칙하지만 완전히 무작위한 것은 아님을 밝혀냄으로써 2005년부터 2008년 정도까지 <네이처>,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 등에서 주로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이어진 논쟁을 해소하는데 기여했다. 이 주제에 관한 연구는 폭발적 동역학(bursty dynamics)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진행중이며 최근에는 위키백과 데이터 등을 활용하여 저런 인간 행동패턴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계속 연구하고 있다.


연결망 과학을 나의 주요 연구분야로 선택한 이후 난 늘 물리학자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왔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도 물리냐?”라는 질문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고민했기에 그런 혼란 속에서도 나름의 중심을 잡아온 게 아닌가 생각한다. 많은 고민 끝에 이제는 저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끊임없이 변하면서 발전하는 학문의 속성을 인정하고, 그래서 저 질문에 “그게 중요해?”라고 되물을 수 있는 여건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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