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리단길 '어서어서'
경주에 왔다.
일과 사람에 치여 지쳐있던 어느 날, '내 생존을 위해서라도 어디론가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홧김에 예매한 기차표의 종착역이 왜 경주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혼자 뚜벅이 여행을 하기도 괜찮고, 적당히 조용하기도 해서가 아닐까. 어쨌든 황금 같은 연휴의 끄트머리, 또다시 출근이 기다리는 월요일을 사흘 앞두고 경주에 왔다.
첫 행선지는 황리단길이었다. 숙소 근처인데다 맛집도 많으니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 꼭 들러야 할 곳이다. 황리단길을 찾은 이유는 또 있다. 작은 책방 '어서어서'를 꼭 가보고 싶었기 때문. 몇 년 전 일본에서 방문했던 '츠타야 서점'을 시작으로 여행하는 도시마다 책방을 찾는 기분 좋은 습관이 생겼다. 나중에 여행지를 떠올릴 때 꽤나 괜찮은 기억으로 남는다. 그 장소만의 성격이 담기기도, 책방지기의 개성이 가득하기도 한 곳. 어서어서는 '어디에나 있는 서점, 어디에도 없는 서점'이라는 뜻이다.
어서어서도 사장님의 취향이 가득 담겨있었다. 빈티지한 소품들부터 귀여운 엽서까지. 시집과 소설, 에세이와 예술 서적 등 다양했다. 이렇게 여행하다가 서점에 오면 꼭 한 권이라도 사야 할 것만 같다. 한참을 둘러보다 내가 단번에 고른 책은 유희열의 '밤을 걷는 밤' . 뮤지션 유희열 씨가 서울의 골목 골목을 거닐며 그의 추억과 감상을 말하는 책이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밤 산책하는 느낌이 물씬 난다.
이 책을 사게 되기까지 신기한 우연이 일상에 차곡차곡 쌓여온 것 같다. 지긋지긋한 출퇴근 길, 한여름 광화문역 지하철 광고판에는 '밤을 걷는 밤' 신간 광고가 걸려있었다. '참 좋은 거구나, 밤에 걷는다는 거'라는 문구가 계속 눈에 들어왔었다. 그 문장만 읽어도 유희열 씨의 나긋나긋한 음성과 특유의 말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라디오에 푹 빠졌던 청소년 시절 DJ유희열의 목소리도 종종 듣곤 했다. 그땐 예능으로 유명해지기 전이라 '토이'라는 뮤지션에 대해선 잘 몰랐을 때였다. 하지만 참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는 건 기억한다. 그 광고판도 새로운 책으로 바뀌고 계절도 제법 선선해졌을 때, 우연히 인왕산 산책로를 걷게 됐다. 무무대에 올라 서울 야경을 바라보던 귀한 시간이었다. 그 좋았던 기억이 내내 나를 따라다니다 경주까지 온 걸까.
'오, 광고에서 보던 유희열 책이다.'
'어? 종로구 청운효자동?'
이 두 생각만으로 펼쳐 든 책 첫 챕터에는 얼마 전 내가 걸었던 그 인왕산 길이 오롯이 담겨있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이 책은 한숨뿐이던 내 출퇴근 길 그 광고에 걸려있을 때부터 내 손에 들어올 작정이었나 보다. 유희열 씨의 다정하고 섬세한 시선을 통해 그 길을 다시 떠올리니 더 좋은 추억이 된 것 같았다. 단 하나의 챕터만 보고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샀다.
어서어서에서는 책을 '읽는 약' 봉투에 담아 처방해준다. 쉼을 찾아 도망치듯 경주로 온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약이 됐다. 어디에나 있는 책이지만 어디에도 없는 우연의 선물. 내가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지는 모르나 여행자에겐 모든 게 새로이 보이니까.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에 돌아와 이 책을 읽어보니 '종로구 청운효자동' 길 외에도 서울 곳곳의 반갑고 또 낯선 거리들이 많았다.
경주에 누워 책으로 서울을 걷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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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_m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