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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마치 Mar 22. 2021

피아노를 팔았다



이사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오랜 시간 한 집에 머문 세월을 조금씩 정리하는 게 꽤 어려운 일이다. 차분히 앉아 짐도, 머릿속도 정리하고 싶지만 일상에 치여 여유 없이 짐을 처분하고 있다. 그 '짐 처리 목록' 중에 20년을 함께한 나의 룸메이트, 피아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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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에 처음 피아노를 선물 받았다. 사촌언니가 쓰던 중고 피아노였다. 내 몸집의 두 배만 한 업라이트 피아노이자 꽤나 유명한 '영창 피아노'였다. 약간 붉은빛을 띤 나무에 입체적으로 꽃 그림이 조각돼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전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니 그만큼 나를 만들고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게 당연하다. 항상 내 방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어서 내 머리나 마음속에도 그만큼의 지분을 갖고 있을 거다. 




그맘때 즈음 다들 그러하듯 부모님의 권유로 피아노를 시작했다. 처음엔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보다 친구와 같이 학원 다니는 게 더 재밌었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건반 위에서 유연 해지는 손가락이 마음에 들었다. 또래에 비해 실력도 나쁘지 않아 칠 수 있는 곡들도 많았다. 항상 새로운 학년이 될 때마다 '나를 소개합니다'의  취미, 특기 칸에는 피아노를 적었다.


지긋지긋해서 못해먹을 지경이 아닌 다음에야 잘 그만두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대로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배웠다.  그 사이 집을 한 번 옮겼고, 당연하다는 듯 피아노를  꼭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맘때  즈음 모두가 그러하듯 취미보다 공부가 중요한 시기가 왔고, 고등학교 2학년을 끝으로 레슨을 그만뒀다. '이렇게 오래 배울  알았으면 차라리 전공에 도전해볼걸' 싶었지만  그럴 실력과 열정은 또 없었다.





현실에 치여 피아노 뚜껑을 여는 일은 눈에 띄게 줄었었지만  때때로 좋은 음악을 연주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이제 그 마저도 없으니 말 못 할 내 감정은 누구에게 전해야 할까.


가끔은 구구절절 이야기해 줘야 하는 사람보다, 영화 한 편 음악 한 곡이 더 큰 위로가 될 때가 있다. 피아노도 그랬다. 피아노를 하도 눈에 밟혀하자 "그렇게 아쉬우면 전자피아노를 새로 하나 사라"고 하지만, 그건 그게 아니잖아.


어쨌든 이제 내 평생을 함께 했던  붉은빛 나무 피아노는 영영 안녕이었다. 아마 그거 없어도 잘 살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좀 많이 아쉬워해야 할 것 같다.



Goodbye My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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