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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이 Feb 22. 2023

짜장면 외상에 대한 에세이

어릴 때 아빠는 외상을 하고 다녔다. 수더분한 다리털이 보이는 반바지에 카키색 깔깔이를 입은 아빠는 나를 중국집으로 데려갔다. 듬성듬성한 머리를 긁적이며 짜장면 두 개를 시켰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아빠가 사주는 짜장면을 맛있게 먹었다. 다 먹진 못해서 각종 야채를 비롯해 면을 남기면 아빠가 눈짓 한 번 주고는 잔반 처리를 했다. 그때마다 물끄러미 바라보면 아빠의 턱에 대롱대롱 땀방울이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게 안을 휘 둘러보면 티브이의 잡음, 주방에서 야채 표면이 익는 소리가 들렸다. 늘 아빠가 짜장면을 다 먹을 때까지 그렇게 기다렸다.


가게를 나올 때, 사장님이 물었다. “계산은 어뜨케 할까예?”, “제가 지갑을 두고 와서.. 이름 앞으로 달아주이소. 아이구. 죄송합니데이.”, “좀 곤란한데예. 외상은 안 됩니다..”, “아유..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잘 뭇습니다.” 아빠는 숨도 안 쉬고 능란하게 말을 이어갔다. 난 그 사이에 서서 사장님과 아빠를 번갈아 보느라 눈알이 바빴다. “그럼 다음에 꼭 결제하이소.” 사장님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아빠를 눈짓하고는 알겠다고 하고는 주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빠는 이에 달라붙은 야채 건더기를 자체 제거하느라 ‘쯔압’ 소리를 내며, 나를 돌아봤다. “집에 가자.”


그 중국집에서 사먹었던 짜장면들은 결국 아빠가 돈을 내지 않았고, 엄마가 갚았다. 엄마는 들어본 적도 없는 욕ㅡ그러나 너무 많이 들어서 익숙해진ㅡ으로 아빠를 힐난했다. 함께 중국집으로 향하면서 계속 욕을 했다. 중국집 문을 열고, 차임벨 소리가 퍼지면 엄마의 목소리는 천상의 것이 되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지예?” 엄마가 짜장면 값을 갚고, 내 손을 잡고 집으로 되돌아오면 나는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 먹은 것은 돈을 내야 한다는 것. 아빠는 내게 그것 하나도 가르쳐주지 않은 셈이다.


성인이 된 나는 짜장면을 먹고 돈을 낸다. 잘 먹었습니다, 공손한 인사도 곁들인다. 하지만 5% 할인은 포기할 수 없어서, 동백꽃이 그려진 카드를 내밀며 결제를 요청한다. 내게 ‘외상’이라는 단어는 신체적 외상, 심리적 외상밖에 없다. 되도록 아빠가 짜장면을 외상 하던 순간을 떠올리지 않으려 한다. 지금 한국 문화에서 허용되지도 않을뿐더러, 내게는 부끄러운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래, 부끄러움이다. 내가 사장님과 아빠를 바쁘게 번갈아가며 볼 때 느꼈던 것은 가진 것이 없고 정당하지 않아서 부끄러운 마음이었다.


요즘은 아빠가 내게 맛있는 것을 먹여주려고 일부러 데려갔겠거니 생각한다. 날 데리고 가면 외상이 더 쉬워서 그랬을 거라는 조금 더 확률이 높은 생각은 일부러 무시한다. 그리고 아빠로부터 대처능력 같은 것은 어느 정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 그 어떤 불리한 상황이 와도 본인의 억울함과 권리를 내세울 수 있는 당당함은 덤이다. 그러나 절대 외상은 하지 않는다. 얼마 전 신용카드 값이 월급을 넘어설 뻔했다. 자제력이 없는 나는 그 상황에서 외상이라는 단어와 중국집에서 내면의 씨름을 이어가던 내가 떠올랐다. ‘안 된다!’ 나는 그 뒤로 체크카드를 애용하고 있다. 신용카드도 일종의, 다음 달의 내게 지는 외상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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