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과 같은 삶과 죽음에 대하여
“오래 살 줄 알았는데...”
가볍지 않은 한 음성이 귀에 꽂혔다가 다시 나왔다. 서로 손깍지를 낀 두 노인 중 한 명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들을 지나치며, 죽음에 대한 짙은 소회가 거기 있음을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길은 ‘죽음에 대한 수용’이란 주제의 대학원 수업을 듣고 나오던 길이었다. 나는 이 순간이 쉽게 잊히지 않으리라는 점을 예감했다.
내가 다니는 상담심리대학원은 의학전문대학원과 함께 있다. 곁으로 간호대학이 있고, 조금 더 아래로 가면 병원과 장례식장이 함께 자리한다. 집으로 갈 때 온몸에 컴컴한 옷을 두르고 쥐색이 된 얼굴을 한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지하철역으로 갈 때면 자연스럽게 죽음을 떠올린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이렇게, 아주 원론적인 물음을 나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다. 하지만 좀처럼 답 비스무리한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이미지는 있다. 팽글팽글 돌아가고 있는 은색 동전 하나. 동전은 돌고 돌다가 결국 어느 면을 천장으로 하고 멈춰 선다. 그것은 삶 혹은 죽음이다. 이처럼 삶과 죽음은 아주 가까이 있지만 정반대에 있다.
나에게도 죽음을 면면으로 하고 동전이 멈춰 섰던 때가 있다. 눈을 감으면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선 고등학교 1학년의 내가 떠오른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나는 학교에선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그렇다고 가족이 내게 수용과 격려를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철저히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 죽음이 다가왔다는 직감이 들었다. 동전이 타원을 그리며 팽글팽글 돌고 있었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타당한 마음이었다. 고립된 사람은 죽음을 유심히 보게 된다.
하지만 나의 동전은 자주 삶을 향해 돌아서기도 한다. 아주 개운하게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길고양이가 투박한 인사를 건넬 때, 마음이 맞는 누군가와 함께 웃을 때, 나의 동전은 빙글빙글 돌다가 삶을 향해 환하게 돌아선다. 그것이 ‘삶’의 순간임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별 게 삶이 아니라, 별 거 아닌 게 삶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는 고개를 깊숙이 숙인 나머지 땅바닥에 닿을 것 같은 아이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리고 손을 건넨다. 거기에는 작은 은색 동전이 있다. 그 애가 물끄러미 그걸 바라보기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나는 동전을 뒤집는다. 죽음 뒤에는 삶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삶이란 아주 작고 별 거 아닌 순간임을 알려주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