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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이 Jul 07. 2023

고통의 매력

등산에서 찾은 고통의 의미

어릴 때는 집 뒤에 산이 있어서 친구들과 자주 올라갔다. 이름 모를 풀들이 무릎이며 종아리며 잔뜩 묻어서 털어낼 엄두도 나지 않았던 기억, 적확한 언어를 찾지 못해 단지 ‘예쁘다’ 고만 생각했던 호숫가, 숨이 찬 줄도 모르고 발랄하게 뛰는 심장으로 성큼성큼 올랐던 경사.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산을 오르는 것이 그렇게 무섭거나 시시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순전히 등산을 시작하기 전의 느낌이지만 말이다.

  작년 8월, 나는 승학산을 시작으로 등산을 취미에 편입시켰다. 등산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고 해도 약간은 충동적인 감이 있는 결정이기는 했다. ‘갈까?’, ‘가보자.’ 짧은 마디의 주고받음으로 성사된 약속으로 약간의 꺼림칙함을 느끼며, 약속 날짜를 기다렸다. 마침내 등산 당일, 맥모닝을 먹은 후 동아대 정문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우리의 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고 얼핏 보면 속도도 비슷한 것 같았지만, 다리가 짧아선지 계속 추월을 당했다. 그렇게 추월당하며 길을 걷다가 어떤 갈래길이 나왔다. 고민하던 우리 사이로, 등산복에 무선헤드폰까지 무장한 등산객 한 분이 앞질러갔다. 옳다구나. 저분을 따라가면 되겠다! 막연히 생각했다. 참 막연했다.

  그렇게 따라간 곳은 초보자에게는 맞지 않는 급경사 구간이었다. 그분은 마치 도인처럼, 깃털만치 가볍게 경사를 올라갔다.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무릎이 거의 가슴께에 닿는 것을 보며 기겁을 했다. ‘이게 맞을까?’, ‘아니지 않을까...’ 처음부터 고수의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닌가 생각만 하며 한 걸음씩 내디뎠다. 참고로 말을 하지는 못했다. 말을 하는 만큼 속도가 줄었기 때문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등산 장면임을 그때 깨달았다.

  거친 숨으로 기어오르며 수많은 등산객 분들께 길을 물었다. 그 후 간단히 나눈 스몰토크에서 ‘승학산은 동네 뒷산’, ‘간단히 오를 수 있는’, ‘전문 산악신발이 필요하지 않은’ 등의 경악스러운 이야기를 들었다. 머리에 산소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 가만 멈춰 선 내게는 경악스러움 그 이상이었다.

  얼마나 올랐을까, 정상인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정상 전 하나의 봉우리가 있다고 했던가. 그 봉우리에서 우리는 하산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고통스러웠다. 사람들은 왜 등산을 하고, 왜 고통을 선택하는가. 무엇을 위한 결정인가. 승학산에서 나는 그만 소크라테스가 되어버렸다. 고민하던 찰나, 한 등산객 분과 동행을 하게 되었다. 그분이 나누어주신 참외에 약간의 울컥거리는 감동을 느꼈다. 모자가 없었던 나는 그분께 등산모자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지하상가에서 만 원짜리 바람 잘 통하는 것으로 대충 골라사면 된다는 답변을 얻었다. 그게 왜 그렇게 웃겼는지, 언니와 무릎을 치며 웃다 보니 다시 오를 만한 힘이 생겼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리는 정상에 올랐다. 더 이상 오를 데 없는 그곳에서 나는 등산을 사랑하게 되었다. 한 달 뒤, 지리산 천왕봉을 등정할 정도였다. 탁 트인 산의 종점에 어떻게 왔느냐 자문하면 내 두 다리로 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초여름의 뙤약볕은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지만, 마음만큼은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정복’이라는 단어도 떠올랐다. 그 단어의 쓰임새는 산 정상에서 가장 잘 쓰일 수 있으리라.

  <최선의 고통>에서는 사람들이 고통을 선택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의미를 꼽는다. 십분 공감한다. 다섯 개의 돌계단만 올라도 하산하고 싶은 것이 한결같은 나의 마음이지만, 정상에서 숨을 들이쉴 나를 떠올리면 성큼성큼 오를 힘이 생긴다. 하나의 산이 나의 삶에 들어올 것을 상상하며 나는 어김없이 등산화를 신는다. 비록 예정된 고통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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