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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테씨 Nov 23. 2021

와인을 유리잔에 마실 수 있는 여유

와인. 특히 레드와인. 내가 정말 사랑하는 술이다. 맛과 향이나 빈티지 같은 것을 따지는 정도의 전문가는 아니다. 다만, 와인을 마실 때의 분위기와 여유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와인을 예쁜 곡선의 와인잔이 아니라 투박한 머그잔에 마신 세월이 꽤 된다. 심지어 플라스틱 와인잔도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심각했을 때의 일이다. 거리두기 단계가 격상됨에 따라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다. 나와 다르게 회사로 출근했던 그이에게 오후 1시쯤 갑자기 전화가 왔다.


"나 퇴근해요"

"응?"

"회사에 확진자가 나와서 전원 퇴근이래. 가서 코로나 검사받으러 가야 해요"

"아...조심해서 와요"


회사에 확진자가 나왔으며, 같은 층에 근무하는 사람이라 급하게 퇴근한다는 소식이었다. 그이를 기다리며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메일에 코로나 관련 소식이 실려들어왔다. 내용인 즉슨, 내가 일하는 층에 확진자가 한 명이 아니라 3명이 나왔으니 재택근무 인원 포함, 해당 층의 모든 인원은 코로나검사를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덜컥...심장이 내려앉았다. 나와 그이 모두 오늘 코로나검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 이다. 검사는 받으면 되지만 혹시나, 정말 혹시나 확진자가 되면? 그 뒤에 이어질 일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엇보다 아들이 떠올랐다. 그 동안의 생활패턴으로 보아 내가 확진자가 된다는 건 이제 겨우 3살인 아이도 확진자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 아이가 겪게 될 검사, 고통, 치료, 격리...생각만 해도 끔찍한 걱정을 뒤로 하고, 일단 검사소를 향했다. 검사를 받았다. 그이도 검사를 마쳤다. 이제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심난한 마음이지만 일은 해야했다. 


재택근무를 마치고 저녁이 되었다. 일단 검사를 받은 사람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자가격리를 해야하기에, 아이는 시부모님께서 결과 나올 때까지 봐주시기로 했다. 잠을 자야하는데 걱정되는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아이 없이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니 은근슬쩍 와인이 생각났다. 물론 술을 마실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마음의 안정을 핑계삼아 딱, 한 잔만 마시기로 했다. 


딱 한 잔만 마시고 자자 (출처 : Envato)

  

와인을 꺼냈다. 컵을 꺼내기 위해 찬장을 열었다. 습관처럼 손이 머그컵으로 갔다. 아이가 태어난 후부터 와인을 머그컵에 마셔왔던 이유였다. 예측불가한 속도와 엄청난 활동량을 자랑하는 아이의 움직임에 혹여나 깨질까봐 와인잔을 안 꺼낸 지 거의 3년이 되었다. 


여러 의미에서 특별한 날이기도 하고, 모처럼 유리잔을 위협하는 존재가 없는 날이니까, 살며시 유리와인잔을 꺼냈다. 코르크 마개를 땄다. 쪼르르르... 머그잔에 와인을 따르면 그저 음료수처럼만 느껴지는데 반짝이는 유리잔을 따라 내려가는 와인을 보니, 이게 진짜 와인 마시는 분위기구나 싶었다. 얼마만에 느끼는 여유인가.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일상이 속도전이 되었다. 아이의 움직임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그만큼 위험요소도 많다. 몸은 앉아있다고 하더라도 눈으로, 귀로 하루 종일 신경써야한다. 한 마디로, 여유가 없다. 그 동안 이 여유없음만을 탓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날은 오히려 아이로 인해 여유의 소중함을 깨달은 날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와인을 와인잔에 마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일이 되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와인잔이 나에게는 소중해졌다. 아이 덕분이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그이와 나는 코로나 검사 음성결과 문자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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