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테씨 Mar 13. 2022

사랑하기 좋은 우중충한 날씨

Netflix & chill

날씨가... 아주...

Netflix & chill 하기 좋은 날씨다.


스페인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렇게 우중충한 날이면 친구랑 집에서 하루 종일 와인을 마시곤 했다. 물보다 와인이 싼 나라라서 술을 잘 못 마시더라도 항상 잔뜩 사 왔었다. 또 체리가 엄청 맛있고 저렴해서 정말 그릇에 한가득 부어놓고 손 끝이 빨개지도록 먹곤 했었다. 그리고 해가 지면 동네 바에 가서 흐느적거리곤 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런 흐린 날이면 어김없이 와인을 찾았다. 아마 내가 와인을 좋아하게 된 건 술을 처음 접하는 20대 초반 시절을 스페인에서 보냈기 때문이 아닐까. 스페인에서는 친구들과 함께였다면 한국에서는 연인과 함께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나의 연인들은 와인을 못 마시는 사람들이었다. 소주파였다랄까. 그래서 나는 20대까지만 해도 젊은 남자들은 와인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내가 20대 때 와인을 함께 즐길 줄 아는 남자를 만났다면 진짜 푹 빠졌을 거다. 굳이 젊은 남자로 한정한 이유는 나의 아버지가 와인을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뭐 주종은 달라도 각자 즐긴다는 것은 동일했기 때문에 조금 아쉽긴 하지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약간의 취기가 돌기 시작하면 하나둘씩 벗어던지고 사랑을 하곤 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조금 흐린 날씨는 나름 섹시한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우중충한 날의 의미는 바뀌었다. 몽환적이고 섹시한 날이, 날씨가 좋지 않은 날로 변했다. 추위, 혹은 미세먼지 때문에 밖에 나갈 수 없는 날씨, 어쩔 수 없이 유튜브라는 미디어에 아이를 맡기며 엄마로서의 무능함을 느끼는 날이 되었다. 무언가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무엇을 해줘야 할지 몰라서 '집에서 아이와'  '아이와 요리'따위의 키워드들을 초록창에 검색한다. 그러다 보면 세상 멋진 엄마들 참 많음을 느끼며 자괴감을 느낀다.


오늘은 마트에 가서 호떡믹스 같은 간단한 놀이 겸 먹을거리를 사볼 예정이다. 원래 요리는 잘 못 하기도 하고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성공할 지도 미지수이고, 성공한다고 해도 입맛 까다로운 아이가 먹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날씨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냥 최선을 다 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가고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람차게 보냈다고 추억할 수 있겠지.

작가의 이전글 도련님이 서방님이 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