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의 숲 Letter
안녕하세요. 공백의 숲입니다.
어느덧 10월이네요. 비로소 가을이 왔다는 게 느껴집니다. 이번 편지까지 하면 올해 1월부터 10개의 편지를 썼는데요. 올해 초 편지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많은 편지가 쌓일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어요. 10개월을 흘러오다 보니 이제는 출발했던 곳보다 도달할 곳에 좀 더 가까워진 듯합니다.
올해 2월 숲에서 보내는 편지에서는 ‘~(으)로 흘러가는’이라는 주제로 편지를 썼었는데요. 8개월에 걸쳐서 겨울과 봄, 여름을 거쳐 가을까지 왔으니 이번 10월에는 ‘~(으)로 도달하는’이라는 주제로 편지를 쓰려합니다.
저희는 어딘가로 계속 흘러가는 마음을 글과 이미지로 편지에 담아 전달하고자 했어요. 우리는 이제껏 어디로 얼마큼 흘러왔을까요? 바다에 도착한 걸까요? 원하는 곳에 도달했는지 아직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흘러 흘러 어딘가에 당도했다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다다랐다는 것은 새로운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하기도 하지요. 그곳이 원하던 목적지가 아니더라도 괜찮아요. 우리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한 해의 끝에 다다르고 있어요. 저희의 편지가 새로운 배로 갈아타기 전 놓고 내리는 것은 없는지, 혹은 버려야 할 것이 주머니에 들어있지는 않은지 나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도달
1. 목적한 곳이나 수준에 다다름.
공백의 숲을 만든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만들게 된 것이라 이렇게 만족스러우면서도 오래 할 수 있으리라곤 예상도 하지 못했다.
나에겐 공백의 숲을 만들고, 인스타그램에 처음 게시글을 올리는 것부터가 굉장히 용기를 낸 일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목표로 했던 것은 단순히 내 손으로 창작물을 만들고, 그걸 세상에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공백의 숲은 목적에 다다른 것이다.
1년이 지난 지금은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냈는데? 더 많은 걸 할 수도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어딘가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다. 이리저리 애를 쓰며 마침내 목적을 이룬 나를 잠시 칭찬해 주고 그 후엔 계속 흘러가고 싶다.
흐르다 보면 또 1년 후에는 지금 목표로 하는 곳 또는 형태가 조금 불분명한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더 나은 곳에 도달할 수도 있다. 더 나은 곳이든 아니든 어디에든 도달하기만 한다면, 그때에도 훨씬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는 걸 믿으며 멈추지 않을 것이다.
대학교 2학년, 하나둘 실습을 나가는 동기들을 보며 나만 느린 것 같아 매일 불안하고 조급했던 때가 있었다. 마음이 힘들어서 그랬던 것인지 무슨 생각으로 그랬었는지 모르겠지만 무작정 학과 교수님 연구실로 찾아가 한참을 울면서 얘기했다. ‘이렇게 느리게 가다가 어딘가에서 낙오되는 것은 아닐까요. 불안해요.’ 교수님은 한참을 들으시다가 말씀을 하셨다. ‘인생은 길어요. 특히 우리 전공은 장거리 마라톤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누가 먼저 빨리 가냐 보단, 누가 더 멀리 가냐가 중요해요.’ 신기하게도 그땐 그 한마디를 듣자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지금은 전공과는 다른 꿈을 꾸고 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난 장거리 마라톤을 완주하지 못하고 낙오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마라톤을 하던 중 더 마음에 드는 길을 발견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길을 후회하지 않기 때문에 후자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많은 순간 뒤처지고 흔들리면서 내가 믿었던 것들이 깨졌을 때 비로소 한 발자국 나아간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매일이 불안하고 조급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다만 두렵지 않다. 이것들이 나를 더 나아가게 만들어줄 것이란 걸 이젠 알기 때문이다. 흔들리고, 나아가고, 흔들리고, 나아가고··· 반복하다 보면 결승점엔 반드시 도착하게 되어 있다.
추신에는 저희가 매달 좋아하던 노래나 영화, 드라마, 책 등을 소개합니다. 열 번째 추신은 시입니다.
난류 - 사이토 마리코
바다를 건너가는 떼로부터
뒤처져 버린 새 한 마리는
따라붙을 수 있으리라 믿고 날아가면서
어느새 바다 그 자체가 될 것이다.
하루가 작은 새 한 마리라면
나는 그 긴 홰이고 싶다.
2021년 10월 20일 공백의 숲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