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백의 숲 Sep 20. 2021

숲에서 보내는 편지 9월 호

공백의 숲 Letter

9월의 안부


 안녕하세요. 공백의 숲입니다.


 이번 9번째 편지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편지를 씁니다. 오늘은 여름 내내 틀어놓았던 선풍기를 끄고 창문을 열었어요. 찬 기운이 가끔가끔 창문으로 들어올 때면 높고 파란 하늘과 고소한 냄새, 포근한 옷들, 선선한 바람이 저절로 떠올라서 설레어요.


 가을이 점점 짧아지는 까닭에 이번 편지는 어쩐지 가을의 초입에서 보내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가을을 기대하는 이런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조금 일찍 가을의 숲에서 보내는 편지를 쓰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9월 초에 쓰고 있는 이 편지가 9월 중순에 읽는 분들에게 가을을 조금 더 가져다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을의 공기가 잔뜩 느껴지는 9월에 도달하였으니 이번엔 가을을 가득 담은 편지를 준비했어요. 4월 봄 호와 7월 여름 호에 이어서 공백의 숲만의 가을 식물도감과 단편소설 ‘숲이 사라졌다’의 세 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짧은 가을일지라도 가을의 모든 것들을 만끽할 수 있는 풍성한 가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또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도 있겠죠. 편지에도 힘과 함께 풀벌레 소리도 보태어 가을바람에 실어 보냅니다. 가을이 여러분들의 창문을 두드리면 반갑게 맞아주세요.


가을 숲으로부터


감: 쌍떡잎식물 감나무목 감나무과의 감나무속

C의 이야기: 저는 감을 꽤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단감도 좋고요, 홍시도, 곶감도 좋아요. 감나무에 매달린 탐스러운 주황빛 열매를 보는 것은 저만의 가을철 눈요기 중 하나입니다. 까치밥까지 챙겨줄 수 있으니 참으로 정겨운 과일이 아닐 수 없네요.


은행나무: 은행나무과 은행 나무속 낙엽교목

M의 이야기: 길가에 떨어진 은행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용쓸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피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이 떨어진 은행 밭을 마주하는 날에는 포기하고 밟고 지나갑니다. 그러고 나면 신발에 은행 냄새가 잔뜩 배어서 신발에 은행나무를 달고 다니는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밤: 쌍떡잎식물 참나무목 참나무과의 낙엽교목

M의 이야기: 어릴 적엔 밤송이가 혹여 신발을 뚫고 발을 찌를 것이 걱정되어 요리조리 피해 다니곤 했습니다. 아직도 그런 걱정을 종종 합니다. 그래서 떨어진 밤송이를 발로 요리조리 까서 밤을 쏙 꺼내는 사람을 보면 꼭 괴물을 물리친 사람처럼 멋있어 보입니다.


코스모스: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의 한해살이풀

C의 이야기: 저에게 가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코스모스예요. 햇빛에 투명하게 비치는 꽃잎들이 높은 하늘을 그려내고, 바람에 흔들리는 가냘픈 줄기들이 가을의 선선한 날씨를 노래합니다.


고구마: 쌍떡잎식물 통화식물목 메꽃과의 여러해살이풀

M의 이야기: 가을이 왔음을 실감하는 시기는 고구마 냄새가 나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길거리에도, 집 안에도, 편의점에도 고구마 굽는 냄새가 납니다. 세상에 온통 고구마로 뒤덮여서 마치 고구마 세상에 온 것 같을 때 비로소 가을이 온 것 같습니다.


숲이 사라졌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내려온 지 6개월이 되었다. 다시 회사로, 도시로 돌아가는 것은 싫었지만 조금씩 불안한 마음에 틈날 때마다 구인 사이트를 들락거리게 되었다. 섬마을을 또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했지만 슬픈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불안한 감정이 점점 커졌다. 그래도 이번엔 될 수 있으면 휴일을 제대로 챙겨주는 회사를 가고 싶었다. 그러면 어쨌든 휴일만이라도 섬마을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온종일 우울한 기분으로 누워 있다가 자기소개서라도 조금씩 손을 보기 위해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책상 앞에 있는 창문 너머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말 가을이 왔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가을 공기 덕분에 보송한 기분으로 자기소개서를 수정하기 시작했을 때 즈음 뭔가 이상하고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타자를 치던 손을 멈추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오래간만에 공사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다. 이건 정말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원래 이맘때 즈음이면 풀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고도 남아야 했다. 10마리의 풀벌레가 소리를 낸다면 각자 다 다른 소리를 내는, 조금은 수다스러워도 기분 좋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풀벌레 역시도 사라지게 된 것일까.

 내가 없는 4년 동안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섬마을은 정말 많이 변했다. 6개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변화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지난 6개월만 하더라도 눈에 띄게 많은 변화가 생겼다. 처음엔 콘크리트 기둥이 한 개만 있던 자리엔 콘크리트 기둥이 6개로 늘어났고, 숲 터널이 사라졌고, 이젠 풀벌레 소리마저 사라졌다. 무엇이 더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이젠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우울한 기분을 떨치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오히려 더 우울해진 기분이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차갑고 답답한 기둥 6개가 우울해진 내 기분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너희는 계속해서 늘어나겠지. 책상에 앉아 산 아래로 흐르는 냇물, 이리저리 자리를 뻗는 풀들, 둘둘 감싸고 올라간 넝쿨 때문에 쓰러지기 직전인 도로 반사경 같은 것들을 보는 걸 참 좋아했다. 하지만 이젠 그 위에 볼품없는 기둥들이 불청객처럼 끼어들었다. 그래. 넝쿨. 차라리 넝쿨들이 기둥 위에 달라붙어서 감싸고 올라가면 좋겠다. 그래서 기둥보다 더 높은 곳에 넝쿨이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불안함이 슬픈 감정을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 그렇지 못한 거 같다. 아무래도 이렇게 되는 건 슬프다. 지금 보고 있는 이 장면은 아마 오늘로 마지막이겠지. 내일은 또 더 많은 콘크리트가 쌓일 것이다. 내일모레에는 더 높이. 그다음 날에는 또 더 높이. 그러다 보면 한 달 후엔 한 개의 기둥이 더 추가되겠지. 그리고 언젠간 그 위에 도로도 깔아서 저곳에는 고속도로가 생길 것이다. 그럼 난 꼭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섬마을의 모든 것을 그리워하겠지.

 어쨌든 지금 이 모습이라도 조금 더 눈에 담아두기로 한다. 언젠가 사라지게 될 것들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담아두어야겠다. 불청객 같은 기둥들이 있더라도 숲이 더 사라지기 전에 밖에 나가 풍경을 보고, 냄새를 맡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겉옷을 챙겨 입고 서둘러 나갔다.


P.S.

추신에는 저희가 매달 좋아하던 노래나 영화, 드라마, 책 등을 소개합니다. 아홉 번째 추신은 시입니다.


가을의 소원 -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2021년 9월 20일 공백의 숲 드림.

작가의 이전글 숲에서 보내는 편지 8월 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