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의 숲 Letter
안녕하세요. 공백의 숲입니다.
어느덧 아침에 일어나 침대를 나서기가 무서워지고, 혹여 찬바람이 새어 들어올까 옷깃을 단단히 여미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찬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2021년의 마지막 편지를 위해 펜을 듭니다.
이젠 올해도 며칠 안 남았네요. 11월부터 연말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12월이 되니 곳곳에서 들리는 캐롤 소리와 눈부신 조명들, 알록달록한 장식들 덕분에 진짜 연말 분위기가 나는 것 같습니다. 괜히 따뜻한 것 같고, 행복한 것 같은 분위기가 가득해서인지 어쩐지 마음을 조금 편하게 먹게 되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이번 편지도 괜히 더 따뜻하고, 편하게 쓰고 싶어집니다.
이번 12월의 편지는 사계절의 마지막, 겨울을 담아 보냅니다. 이번에도 역시나, 공백의 숲만의 겨울 식물도감, 그리고 단편소설 ‘숲이 사라졌다’의 마지막 이야기 또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편지를 받아주신 여러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숲에서 보내는 편지는 이제 끝이 나지만 저희가 보낸 편지 하나하나가 여러분들 마음에 오래도록 남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여전히 밖은 춥고 날이 따뜻해질 때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시간을 견디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 추운 겨울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늘 행복하세요.
아 참, 공백의 숲의 편지는 이번이 마지막이지만 다음 달에는 이제껏 저희의 편지를 받아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부록 편지가 발행됩니다. 부록 편지도 놓치지 마세요!
귤: 쌍떡잎식물 쥐손이풀목 운향과의 상록 소교목
C의 이야기: 날씨가 쌀쌀해질 무렵부터 집안 한구석에는 귤 상자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밥 먹고 입가심으로 하나, 오후에 출출하니 또 하나, 오고 가며 하나씩. 겨울엔 손끝이 노래지도록 귤 까먹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피라칸타: 쌍떡잎식물 장미목 장미과 피라칸타속
C의 이야기: 이전 계절들의 다채로운 빛을 잃은 겨울의 풍경 속에, 눈길을 끄는 주홍빛 열매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아마 피라칸타 열매일지도 모릅니다. 열매의 붉은빛과 푸른 이파리, 파란 하늘의 조합을 만나면 카메라를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동백: 쌍떡잎식물 물레나무목 차나무과의 상록교목
C의 이야기: 저에게 있어 겨울을 상징하는 꽃은 동백꽃인데요. 저는 아직 제대로 동백꽃을 만나본 적은 없습니다. 추울수록 더 진하고 큰 꽃을 피워낸다는 동백꽃. 동백꽃을 만나게 되는 날, 저는 겨울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 같습니다.
유자: 쌍떡잎식물 무환자나무목 운향과의 상록관목
M의 이야기: 유자청은 마트에서도 1년 내내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겨울에 유독 먹고 싶어집니다. 이상하게도 다른 계절에 먹으면 겨울에 먹었던 그 맛이 나지 않습니다. 분명 따뜻한 유자차이지만 어쩐지 추위의 맛이 느껴지지 않으면 유자차 같지가 않기 때문일까요?
석류: 쌍떡잎식물 도금양목 석류나무과의 낙엽소교목
M의 이야기: 겨울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과일은 석류입니다. 막상 먹어보면 알알이 조금씩 붙어 있는 과육을 떼어먹기도 힘들고, 먹을 땐 입이며 손이며 모두 빨갛게 물들어서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긴 하지만 겨울이 되면 석류를 꼭 먹게 됩니다. 따뜻한 곳에 앉아 하나씩 입에 넣어 씨를 발라 먹는 석류는 불편함을 뛰어넘을 정도로 맛있기 때문입니다.
“남양주 수동? 수동 주민이세요?”라는 면접관의 물음에 어쩐지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찝찝하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으나 어찌 되었든 면접 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표정관리를 했다. “네. 수동 삽니다.”
“이야~ 부자시겠네. 내가 예전에 수동에 땅 사려고 갔었을 땐 엄청 쌌었는데. 지금은 고속도로도 생기고 그래서 땅값 엄청 오르지 않았어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고속도로가 생기고 있...”
“아유 내가 그때 땅을 사놨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여기에 앉아있지도 않았지. 그렇게 오를 줄 알았나.” 나이가 많아 보이는 면접관이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고, 옆에 있던 면접관들은 조금 난감한 눈치였다. 인사를 하고 나오며 차라리 면접에서 회사를 거를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하기로 했다.
면접을 끝내고 나오니 빈틈없이 들어차있는 빌딩과 그 사이사이 더 빈틈없이 서 있는 사람들과 자동차들을 보고 있던 지민은 어쩐지 조금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에 애써 숨을 쉬고자 한숨을 내뱉었다. 하얀 입김도 같이 떠오르다 이내 사라졌다.
역까지 버스를 탈까 하다가 밀리는 차를 보며 차라리 걷는 것이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걷기 시작했다. 낙엽이 지고 있는 가로수들이 줄줄이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규칙적으로 심어져있는 나무들이 지민에게는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나무가 자라는 자리마저 이리저리 재며 규격을 정해두었을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이었다. 원래 나무의 자리였던 공간을 뺏어 큰 빌딩을 세우고, 그 옆에 작은 공간을 인심 쓰듯 나무에 할당하는 것이 퍽 우스웠다.
지민은 약간의 냉소를 담은 채로 집으로 향했다. 동네 버스를 타자 동이가 보였다. 다가가 동이의 옆에 앉자 처음엔 알아보지 못한 듯 보이다가 이내 놀라며 동이가 말했다.
“뭐야 이렇게 보니까 완전 도시 사람 다됐네.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나 면접 보고 오는 길. 이제 슬슬 다시 취업해야지.”
“그러냐. 이제 또 한참 못 보겠네. 안 그래도 이제 동네에 또래가 많이 없어서 네가 있는 게 좋았는데.”라는 아쉬움 섞인 동이의 말에 지민은 피식 웃으며 동이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래도 다음엔 휴가 많이 주는 곳으로 가려고. 이젠 체력도 안 돼서 밤새우고 야근하고 하는 것도 못해, 못해.”라며 지민은 손을 휘저었다.
“그래, 그래 자주 내려와. 아줌마, 아저씨도 티는 안 내셔도 명절 때 안 내려오면 서운해하신다.”
“그래야지.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놓친 게 많다.” 동이는 옆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무언가 생각난 듯 지민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 맞다. 근데 가기 전에 나 컴퓨터 좀 알려주면 안 되냐?” 지민은 아무 말 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눈빛으로 동이를 쳐다봤다.
“아니, 요새는 막 인터넷에 올리면 농사지은 것들 누가 막 주문해 주고 그런다고 하길래. 안 그래도 동네 사람들도 이제 다 나가서 우유나 농사지은 것들이나 팔리는 속도가 더디거든. 그래서 한 번 해볼까 했는데 내가 뭘 알아야 말이지...”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말하는 동이를 보며 지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어느덧 버스의 창문 너머로 동네의 풍경과 그 위로 고속도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슨 기둥이람’이란 생각이 들게 했던 고속도로의 모양새도 볼 때마다 점점 더 높아지고, 견고해져서 이젠 ‘무슨 고속도로람’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모양새가 갖춰졌다.
“고속도로가 진짜 생기긴 생기는구나.” 지민이 작은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동이가 “그러니까. 생기네 마네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다 되었으니. 시간 참 빨라”라며 차창 너머를 쳐다봤다. 그리곤 작게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젠 나름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해. 나중에 이사 오는 사람들은 아마 저 자리에 산이 있었는지 뭐가 있었는지도 모를 걸.” 지민 또한 약간 씁쓸한 미소를 띠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겠지. 그래도 넌 까먹으면 안 된다. 옛날 모습 기억하는 사람 한 명 정도는 더 있어야 추억이라도 할 수 있지.”라는 말에 동이는 그러겠다 약속하며 너도 잊으면 안 된다고 한 번 더 당부했다.
지민은 고속도로 위로 원래 있던 산의 모양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평생을 그 산을 보며 자라왔기에 지민의 머릿속엔 망설임 없이 울창한 숲이 그려졌다. 지민의 한 조각이었던, 그리고 여전히 지민을 구성하는 것들 중 하나인 그 숲을 지민은 머릿속으로 오랫동안 그렸다.
추신에는 저희가 매달 좋아하던 노래나 영화, 드라마, 책 등을 소개합니다. 열두 번째 추신은 노래입니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 Ryuichi Sakamoto
2021년 12월 20일 공백의 숲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