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과 ‘직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른 단어다. 생계유지를 위한 행위라는 점에서, 두 단어의 출발선은 같지만 직업은 일을 수행하는 적성과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직장은 돈을 버는 장소이거나 수단에 더 기운다. 직장이 없어도 직업은 있을 수 있고, 직장은 있지만 직업적 능력이 없는 사람도 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동생은 화가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대학교를 다닐 무렵,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학생이라는 간편한 대답이 있어 좋았다. 비록 우리 남매는 학생이라는 직업과는 별개로 스스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한 이런 저런 직장 또한 가져야 했지만 그런 상황이 서글프거나 씁쓸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를 부양하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대견함을 더 크게 느꼈다. 젊은이라면 응당 누구라도 이정도 사회의 쓴 맛 정도는 누리는 것이라며. 자조보단 자부에 가까운 마음을 먹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대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직업은 없지만 직장만 있는 사람이 되었고 반대로 동생은 직업은 있지만 소속된 직장은 없는 사람이 되었다.
동생은 자신과 자신의 직업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일을 했다. 입시생을 가르치는 학원 선생님부터,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캐리커쳐를 그린다거나, 디자인 외주를 맡아 외벽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내가 안정을 좇아 고정적인 월급이 들어오는 회사를 다니는 몇 년간, 동생은 계속 그림을 그렸다. 자신의 직업란에 ‘화가’라고 쓰기 위해. 여전히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 동생은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리고 그 일들은 얼핏 보면 ‘그림 그리는 사람’의 범주 안에 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실상은 동생이 바랐던 직업과는 달랐다. 예술가라기 보단 서비스업이나 육체노동에 가까운 일, 인정도 안정도 주지 못하는 일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일 마저도 아쉬운 시간들이 늘어갔다. 그림을 그린다고도, 혹은 그리지 않는다고도 말하기 애매한 회색 지대 속에서 동생은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나갔다.
오래지 않아 동생에게 그림이란, 삶의 필수 조건. 그러니까 먹고 자는 일과 마찬가지로 삶을 영위하는 최소한의 단위에 속한 것이 되었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동생에게 그림은 취향이나 좋아하는 마음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 가끔은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니까.
우리가 미래를 염려하고 매 달의 생활비를 계산하는 것처럼 동생은 늘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재료비 걱정을 했다. 동생에겐 햇반이나 레토르트 음식만큼이나 종이와 물감 또한 갈급했다. 어느 쪽이든 넉넉히 주어지는 날이 동생에게도 올까.
종이가 곧 돈이라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없다던 동생은 이면지를 모아 드로잉을 했다. 이면지는 망쳐도 괜찮다고, 비용이 들지 않을 때 비로소 안심하며 원하는 걸 그려낸다고 말하는 동생 앞에서 나는 ‘그깟 종이가 얼마나 한다고’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낮춰 잡아 부르기엔 그림을 향한 마음이야 말로 그깟 돈으로 환원하기엔 너무나 순수하고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가끔 그런 동생을 보며 어떤 안쓰러움보단 무언가를 향한 ‘근시의 사랑’을 지키고 있음이 오히려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동생이 그림을 지키기 위해 빚을 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짐짓 놀라기도 했지만 이내 수긍했다. 언제나 동생은 인정보단 안정을, 안정보단 그저 그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생각했다. 지금의 이천만원짜리 공모전이 아니라도 언젠가 그는 이 모든 것을 갖겠구나 하고.
‘되어야 한다’와 ‘되고 싶다’의 사이. ‘그리고 싶다’와 ‘그려야 한다’ 사이를 오가며 분주했을 동생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고 있을까.
일요일 오후. 동생과 마주 앉아 동생이 그간 그려온 그림과 현재 그림을 그리는 마음에 대해 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이천만원이라는 안정과 공모전 수상이라는 인정과는 상관없이 동생이 이미 화가라고 생각했다. 언제 화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고등학생 시절, 미술 선생님의 손을 잡고 입시학원을 향하던 그 순간이었을까. 아니면 수석합격을 확인 하던 그 밤이었을까. 어쩌면 아주 오래 전. 함께 만화 영화를 보고 또 보던 여름 날 밤. 이미 한 명의 화가는 태어났을지도 모르겠다.
공모전 서류 접수를 끝낸 뒤 동생에게 결과 발표가 언제인지 물었다. 동생은 다다음 주 수요일이라고 말했다. ‘그렇구나’하고 대답한 뒤, 나는 동생의 공모전을 잠시 잊었다. 그렇게 2주가 흐른 뒤 수요일 오후 1시. 함께 커피를 마시던 동생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누나야”
“왜?”
“이거 봐봐.”
동생은 자신의 앞에 있던 노트북 화면을 돌려 내게로 향하게 했다. 넘겨받은 화면위엔 동생의 이름이 맨 윗 자리. 대상 수상자의 자리에 있었다.
대상 장건율
인정과 안정을 모두 얻은 얼굴. 반쯤은 얼이 빠지고 반쯤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동생은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