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지인이 지나가던 나를 찍어서 보여줬다. 사진 속의 표정은 건어물처럼 메말라 있었다. 원래 저런 표정이었던가. 모습이 낯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기억하는 내 얼굴이란 여행을 가든 지인과 있든 즐거운 이벤트가 있을 때 모습이다. 또는 아침 출근 시간에 화장대에서 볼터치할 때 미소 지어 보이는 분홍색 얼굴이거나. 핸드폰 갤러리 속의 표정은 햇살처럼 환했으나 현생에선 퍼석했다.
회사에서는 대개 건조했다.
탈모라던가 총각무 같은 종아리라던가 유독 거친 콧바람 소리라던가 각양각색으로 아름답지 않은 사람들의 외형에 한숨을 쉬었으며, 부서 이기주의에 치를 떨었다.
사람의 몸은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의 삶도 70%의 밋밋한 일상과 몇몇 행복의 순간으로 이루진 걸까? 불교에서 삶은 고통이다. 사실 행복한 삶이라는 것도 허상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즐거운 순간은 간혹 있지 않았을까?
은밀한 행복 리스트 10가지
바호의 '대한민국 파이어족 시나리오'라는 책을 읽었다. 파이어족에 대한 개념원리라고 해야 할까, 수학의 정석이라고 해야 할까. 미국인이 쓴 파이어족 책 보다 더 마음에 와닿은 K-파이어족 입문서다. 저자인 바호는 자신만의 행복을 찾기 위해 지난 1년 동안 기뻤던 순간을 떠올려보라고 한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행복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10가지 정도 추려보았다.
매주 토요일 티브이 프로그램 리뷰 프로그램에서 최고의 1분을 뽑는 것처럼 2023년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다.
1) 시골집에서 세수만 겨우 하고 마당에 나와 고양이를 쓰다듬을 때. 나나는 포근 불멍은 뜨끈. > 시골집 하루 대여 10만 원? 고양이 20년 양육비 3천만 원
2) 콘서트 가서 구 오빠를 가까이서 영접할 때, 듄 같이 훌륭한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 때, 평일 대학로의 연극 > 월 1~20만 원
3) 새 아이돌의 버블 문안 인사. 월 4500원이면 매일매일 미남의 전화와 문자를 살 수 있다. 2023년 최고의 소비 1위 > 월 4500원
4) 행복한 순간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이 울었지만, 힘든 일에 급 번개 쳤을 때 달려와준 친구와의 사심 없는 술자리. 고맙다. > 3만 원
5) 도서관에서 읽고 싶던 책을 상호대차로 빌려서 머리맡에 쌓아두고 읽다가 선잠 드는 시간. 가슴에 담고 싶은 좋은 문장이 있으면 책을 잠시 가슴에 엎고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다가 그러다가 자버리... > 도서관이 가까운 집이라면 0원
6) 1년에 2~3번 해외여행을 떠나 낯선 곳에서 느슨히 생활하기. 1주일 이상의 해외살이. 이번 생에 가능이나 할까. 별거 안 해도 어깨춤을 출 만큼 새로운 경험을 사랑해 > 동남아 대도시 3달 기준 500만 원
7) 금요일 일찍 잠들어 토요일 아침에 기상하여 빨래 돌리고 청소기 두대 돌리고 커피를 내리는 평화로운 순간. 1분 1초가 급박히 돌아가는 평일에는 엄두도 못 내는 찰나의 순간 > 원두값 연 2만 원
8) 근력 운동과 식단 후 살이 빠져서 안 들어가던 옷이 들어갔을 때. 일 90g의 단백질 + 하루 1시간의 근력운동 > 헬스장 월 2만 원 + 스트레스 없고 야근 없는 일상 전제하에 월 10만 원 추가 식비
9) 월 1회 정도의 마사지, 눈썹 왁싱, 속눈썹 연장, 목욕 > 월 최소 10시간과 관리비용 10만 원
10) 아무 약속도 없는 일요일. 집안의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당근으로 정리하거나 오후 2시의 따뜻한 볕이 쬐는 거실에 누워 작은 동물처럼 그저 존재하는 일. > 넓은 거실이 있는 집. 10~100만 원
행복의 가격
내 행복의 가격은 월 130만 원 정도다. 여기다 각종 고정비 하면 월 200만 원 정도일까.
생각보다 물건으로 행복한 순간은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책과 아이돌에 시간을 쓰는 것, 몸과 마음을 가꾸는 것. 경험을 사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생산이 아닌 소비에서만 주로 행복을 느낀다는 점이 아쉽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생산의 시간을 의식적으로 추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