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인 기분을 마지막까지 참으려고 하는 내 성정(性情)은, 타인으로 인해 생긴 마음의 생채기를 오히려 덧나게 했다. 타인의 공격 같은 언행에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그간 내가 그에게 이토록 만만하게 보였던가 싶은 속상함,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털어버리지도 못한 채 꾹꾹 누르며 참고 있는 나 자신이 참 한심했다.
누군가는 나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으로 내게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고, 설마 상처가 되리라 상대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내게는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곪게 하는 건 나였으니까.
나는 그를 믿고 애정하였으나 그를 향한 나의 마음과,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은 그 깊이와 정도가 다를 때가 많았다. 어쩌면 인간관계에 그렇게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인데 나의 다정(多情)이 문제인 것 같았다.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서 가장 혹독한 상처를 받는 일이 반복될수록 인간과 함께 한다는 것이 나에겐 참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는 더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리하여 ‘나’라는 인간은 이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면 될지 늘 기도했다. 답을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끝에 어렴풋하게 깨달은 것은 인간이란 원래 변하는 존재이며, ‘너’와 ‘나’는 절대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도, 인간인 누군가를 절대적으로 믿는 것도 애초에 전제부터 틀린 것이었다. 불변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 그분뿐. 내가 한계를 지닌 존재이듯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도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였다. 그러니 그들이 나를 향해 들었던 돌은 오히려 그들의 부족함이 그 모습으로 드러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후 누군가의 부족함을 직면하거나 나를 향한 공격이 시작되었음을 느낄 때, ‘저이는 그러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내 모든 생각을 멈춘다. 그러면 상대방이 나를 향해 던진 돌은 내 말 앞으로 힘없이 툭, 떨어질 뿐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먼저 올곧게 나 자신을 세우고 나를 감싸줘야 한다. 하느님의 힘을 통해, 그분의 자비를 통해.
불변하는 건 오직 하느님뿐. 그 빛을 따라가다 보면 이 세상이란, 그리고 인간이란 얼마나 가볍고 변덕스러운 것들인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자신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 달라 기도했던 그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역설적이게도 나 자신을 완벽히 지킬 수 있을 것만 같다.
'잔잔'은 가톨릭 신자 혹은 사제, 수도자이면서 예술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모인 커뮤니티입니다.
매달 신앙과 관련된 공통의 주제를 갖고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작품을 발표합니다.
사진과 조각, 그림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발표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방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