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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Jun 20. 2024

은총, 글을 쓴다는 것

<경향잡지> 24. 7월호 '나의 삶, 나의 신앙'


   내 인스타그램 계정에 새로운 ‘팔로우’ 요청이 있다는 알림이 왔다. 지인이겠거니 하며 무신경하게 확인한 알림에는 뜻밖의 이름이 있었다. 바로 서울대교구 양경모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셨다. 나는 수원교구 신자이기 때문에 신부님과 접점이 없다. 그러나 가톨릭평화방송이나 가톨릭 관련 유튜브 채널에서 활동하시는 것을 종종 보았기 때문에 성함은 익숙했다.

매체로만 뵙던 신부님께서 내 계정을 어찌 알게 되셨을까. 게다가 ‘팔로우’까지 하시다니. 신부님들이 운영하시는 계정을 내가 팔로우한 경험은 있어도 신부님이 먼저 내 계정을 팔로우한 것은 처음이었다.     



신부님의 따뜻한 격려

나는 무척 반가우면서도 놀란 마음에 신부님께 내 소개를 겸한 감사 메시지를 보냈다. 몇 시간 뒤 신부님의 유쾌하고 따뜻한 답장이 도착했다. 인스타그램에 내 계정이 ‘추천 친구’로 보였고, 그것을 계기로 온라인상에 있는 내 수필이나 짧은 글들을 읽으신 모양이었다.

신부님은 내 수호성인인 에디트 슈타인을 좋아하기도 하고, 내 글이 ‘너무 예뻐서’ 홀린 듯 내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했다고 하셨다. 내 글에 대해 ‘은총’이라는 말씀까지 해 주시면서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글을 쓴다면 참 좋겠다고 하셨다.

그간 글에 대한 호평을 들은 적이 간간이는 있지만 이토록 강렬하게 칭찬해 준 사람은 신부님이 처음이었다. 은총이라니! 신부님이 해 주신 말이라 그런지 정말 머리 위로 은총의 빛 가루가 반짝이며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수필 문단의 경향에 비하면 꽤 어린 나이인 20대 후반에 등단을 했다. 수필을 쓰게 된 데는 수필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 글의 첫 독자는 언제나 나였다. 내가 열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부터 어머니는 탈고 후 작품 검토를 나에게 맡기셨다. 문장이 조금 이상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면 어머니는 그 말을 모두 꼼꼼히 챙겨 두었다가 글을 고치셨다. 그리고 수정된 원고를 다시 보여 주면서 전보다 나아졌는지 물으셨다. 어머니가 책상에 앉아 글 쓰는 모습은 우리 가족의 일상 풍경이었고, 어머니의 완성된 원고를 읽고 확인하는 것은 나의 당연한 역할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내가 수필을 쓰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나 역시 이를 특별한 재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어머니에게 칭찬을 들을 때도 있었지만, 수필계의 대선배이자 스승이기도 한 어머니 앞에서 내 글은 갈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어머니는 넘실거리는 예술적 감수성을 타고났고, 나이가 들어서도 끊임없이 성장했다. 어머니의 글은 내게 늘 새로운 기준이자 목표였고 어머니의 여러 문학적 성취를 지켜보는 것은 나에게도 행복이었다.

그런 어머니 곁에서 나의 자아는 그저 ‘남들보다 문장을 조금 수월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러했던 나에게 흔히 주고받는 입에 발린 칭찬이 아닌, 신부님의 진심 어린 격려와 축복은 글 쓰는 사람이라는 내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했다. 순간 귀한 능력을 운 좋게 받았고 누리고 있다는 깨달음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하느님에 대해 나누고 싶은 꿈

나는 2007년 봄에 세례를 받았고 그해 겨울에 등단을 했다.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나라 문단을 대표하는 훌륭한 문인들이 그리했듯, 내가 경험한 하느님에 대해 독자들과 마음껏 나누고 싶은 것이 등단할 때의 꿈이었다.

그러나 20대였던 나는 인생과 신앙, 문학의 모든 면에서 알을 갓 깨고 나온 어리고 부족한 존재였다. 그리고 일반 수필집은 보편적 독자를 대상으로 하기에, 수필집에 실릴 글에 신앙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내 능력과 상황을 여러모로 고려한다면 꿈이 너무나 원대했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 깊이 넣어 두었다. 그저 가끔 꺼내어 ‘나에게 이런 꿈이 있었지.’ 하며 혼자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러다 작년 말, 정말 오랜만에 그 꿈을 꺼내어 하느님께 살짝 보여 드렸다.

그로부터 며칠 후,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바로 「경향잡지」 원고 청탁서였다. 청탁서에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로고가 선명했다. 그간 여러 잡지에서 청탁을 받아 왔지만 이토록 감격스러운 청탁서는 처음이었다. 청탁서를 한 글자씩 꼭꼭 새기듯 읽으면서 깊은 감사와 감격,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느꼈다. 그리고 양경모 신부님이 내 글에 대해 건넨 ‘은총’이라는 말씀을 다시 떠올렸다.     



위로와 희망이 될 수 있다면

갖은 어려움을 무사히 넘기고 내가 이 순간 존재하는 것은 모두 크신 분의 보살핌 덕분이다. 눈물이 흐를 때 그분은 곁에서 함께 울어 주셨고, 자괴감으로 온몸이 휘청일 때 나를 부축하고 품어 주셨다. 그분은 친구의 다정한 모습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때로는 양경모 신부님의 메시지처럼 예상치 못한 분의 따뜻한 격려로 끊임없이 나를 다독이셨다.

그렇게 받은 위로와 다독임은 돌이켜 보면 내 수필의 근원이었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것은 그분께서 주신 사랑과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나’라는 도구를 통해 그저 글자로 옮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교회 안팎에서 내 글에 대한 질투인지 폄하인지 알 수 없는 묘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글에 대한 나의 지나친 겸손과, 글을 쓰는 것을 은총이라고 생각지 못한 내 아둔함이 그 원인이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을 고쳐 잡을 생각이다. 지나친 겸손은 접어 두고, 수필이란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에게 허락된 역할임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소박한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이자 희망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참 행복할 것 같다.





24년 7월호 경향잡지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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