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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파먹기 중간 점검

소유는 곧 관리, 비우자 비우자

한 번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시작한 냉장고 파먹기다. 9월 29일에 시작했으니 얼추 40일을 넘겼다. 냉장고를 다 비울 수 있겠다는 생각 따위는 당초에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안 비워진다. 중간 점검 차, 그리고 냉장고를 통제 가능한 범위까지 내용물을 줄여 보겠다는 나의 의지를 다시 한번 다지기 위해 정리를 해 보자.      

1 나의 냉장고는 크지 않다. 


이사를 하면서 15년 사용한 냉장고를 새 냉장고로 바꿀 때 구입 기준은 두 가지 였다. 냉장고 자리에 넣었을 때 배불뚝이처럼 튀어나오지 않는 크지 않을 것. 냉장기능이 위에 냉동 기능이 아래 있을 것. 카탈로그를 뒤져가며 찾은 것이 양문형 530L 용량의 냉장고 였다. 500L 가 어떤 크기인지 몰랐다. 냄비도 쑥 들어가고 수박도 한통 다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이고 좋아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 냉장고도 꽉꽉 차기 시작했다. 특히 냉동고가 비좁다. ‘냉파 50일’을 향해가는 현재도 냉동고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한눈에 보이지 않는다.      


2. 냉장고가 먼저 비워 진다


냉장고 칸은 그래도 얼추 비워지고 있다. 적양배추 반통이 일주일째 그대로인 것 말고는. 과일과 채소 칸에 감자 3알, 사과 10개, 귤 15개가 있을 뿐 금방 상하는 채소는 일단 다 먹어치웠다. 아차차 무가 약간 남아있다. 무나물을 해 먹고 싶어 남겨 두었는데 영 손이 가질 않는다. 무는 얼리면 끝이다. 빨리 먹어야 한다.      

냉장고 안쪽 벽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눈에 들어 온 것이 장류다. 고추장과 된장. 여행가서 지역 특산물이라 구입한 것도 있고 얻은 것도 있다. 매번 된장국, 고추장찌개를 만들어 먹을 수는 없는데... 그래도 다 먹어 보자꾸나. 


나는 절임반찬을 잘 먹지 않는다. 염도가 높아 밥을 먹고 나면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밥을 평소보다 많이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가뜩이나 최근에는 저당밥솥으로 한 밥을 먹고 있는데, 이 밥은 먹을 때는 먹는 것 같아도 영 포만감이 없다. 저작활동만 하게 하는 속는 기분이 든다. 냉장고 양측 벽에 약간의 절임들이 있다. 간장에 담가 놓은 고추, 마늘쫑과 깻잎. 그래! 좀 귀찮더라도 조금씩 꺼내 먹자. 해치울 시간이 왔도다.      

3. 갈등


물론 사이사이 계란이며 두부 같은 것은 계속 냉장고 안으로 공급되었다. 당근 라페를 먹고 싶어 당근도 한번 샀다. 물론 냉장고에 지금 반은 남아 있다. 긁적. 작년에 담근 김치는 마지막으로 졸임을 해서 먹었는데, 그 사이 열무김치, 총각김치, 배추김치를 각기 1 kg짜리로 사서 먹고 있다. 냉장고 파먹기라고 해서 김치를 안 먹을 수는 없다! 긁적.      


아무래도 냉장고 파먹기는 쇼핑 욕구와 벌이는 내적 갈등의 과정 같다. 의, 식, 주 중에 그나마 자유롭게 마음 편하게 소유욕을 해결할 수 있던 것이 식(食, 먹을거리)이었다. “다 먹고 사는 문제다, 먹는 것이라도 편히 먹자, 내 이 정도는 먹을 수 있지 않냐” 등등 이제까지 나는 음식 쇼핑에 대해서만은 관대한 입장을 취해 왔다. 호기심 때문에도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은 나중에 버리는 처지가 될지언정 일단 장바구니에 담고 보는 축이었다. 그리고 변명 같지만 서울살이에서 음식 쇼핑은 이래저래 빠져나오기 힘들 정도로 편하다.      


4. 음식 쇼핑


마켓컬리 중독의 시작은 발에 깁스를 했을 때 부터다. 2017년 9월 초 아침, 광주 출장을 재촉하느라 지하철을 타곗다고 경사진 길을 걷다가 오른발을 삐끗했을 뿐이었다. 발이 퉁퉁 부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광주까지 어떻게 다녀왔는지 참으로 미련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다음날 정형외과를 가려고 나섰는데 가는 길이 삼만리였다. 오른쪽 마지막 발가락과 발목을 연결하는 뼈가 골절되었다고 했다. 그 뒤로 나는 8주 정도 깁스를 했었다.      


당장 이동과 음식이 문제였다. 그때 알았다 집 안에 바퀴달린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바퀴달린 의자가 제 일착으로 집에 들어왔다. 의자를 배치기 하듯 돌려 세워 사용하는 것이다. 다친 다리를 앉는 곳에 올리고 성한 발로 의자를 밀면 살살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의자의 폭이 넓었다. 가스레인지 앞에 의자를 밀고 들어갈 수 없었다. 한 손으로 목발을 집고 균형을 유지한 채 가스불로 음식 조리를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전자레인지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필요했다.      


이미 <한살림>으로 배달을 받긴 했었다. 문제는 한살림은 집 앞이 아닌 1층 경비실 앞까지만 배달을 해준다는 것. 마침 그 때 친구가 알려줬다. 마.켓.컬.리. 보랏빛 썸네일이 내 핸드폰에 깔렸다. 전자레인지용 음식부터 시작했다. 집앞까지 배달해 주니 다친 다리로 연명하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부작용도 있었다. 


핸드폰으로 장보기를 해 본 사람이라면 내가 한 일을 하나 쯤은 했을 것이다. 무료배달이 될 때 까지 장바구니에 무엇인가를 넣는 선택을 한다. 음식 말고 다른 것도 사게 된다. 오늘의 특가를 본다. 할인폭이 큰 물건을 구경한다. 신상품도 구경해 본다. 있을 것 같지 않은 물건을 검색해 본다. 할인쿠폰이 왔다는 알림을 받으면 사용기한을 넘길까봐 안절부절 한다. 그냥 앱을 열어 구경한다. 언제 내가 주문했는지 기억하지 않는다. 어제도 주문하고 오늘도 주문한다.      


냉장고 파먹기를 시작하면서 마켓컬리 앱을 지울까도 생각해 봤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 마음이 강건해지지 못했다. 매일 마켓컬리 장바구니에 음식을 담고 있지만 주문은 하지 않고 일주일 쯤 버틴 것 같다. 조금만 더 버티자. 다 먹고 나서 언제든지 주문할 수 있다. 그날은 올 것이다.      


5. 냉동고를 비우자


 냉동고를 단시간에 비우기는 어렵겠다. 떡, 빵, 강낭콩, 완두콩, 서리태, 옥수수, 생선, 아이스크림, 파, 마늘, 다진 채소, 표고버섯 말고도 뭐가 더 있을 것이다. 이 음식들을 질리지 않고 조화롭게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종목별로 한데 모아 놓고 싶은데 자리가 여의치 않다. 역시 냉동고가 비좁다. 냉장고 파먹기의 후반부는 냉동고에 있는 재료를 위주로 뭔가를 해 먹어야 한다.      


냉동고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보려고 몇 가지를 꺼내다가 그만 두기를 몇 번 했다. 이것도 스트레스였다. 그러니 일을 한다고 마음이 급할 때 냉장고 파먹기를 하기란 더 어려운 일이다. 냉장고 파먹기도 마음에 여유가 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마음이란 것, 생각이란 것도 용량이 있어서 그렇다고 본다. 일이라는 것이 마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때 다른 항목들이 비집고 들어가기 어렵고 그렇게 하려고 하면 스트레스가 되는 것 같다.      


날도 추워지는데 얼려져 있는 채소들은 들깨가루를 넣은 채소탕을 만들어 먹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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