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제도의 변화에 발맞추어 사교육 시장도 들썩들썩합니다. 소위 말하는 사교육 전문가들이 각종 매체를 통해 앞다퉈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예견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 모두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 유리한 주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출간된 어느 책을 읽었는데 적성을 일찍부터 찾는 노력을 해야 고교 학점제에 쉽게 적응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제 수학이 가장 중요한 과목이 될 것이라며 이상한 주장을 폈습니다. 수학은 어느 시대에나 중요한 과목이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당연히 중요한 과목으로 남을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고교 학점제가 시행되면 수학이 더 중요해질 거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저자에 대해서 찾아보니 어느 수학학원 부원장이더군요.
사실 그 수학 선생님은 고교 학점제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분위기를 이끌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요.
언제나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면 실무자들이 우왕좌왕하게 마련입니다. 학교 선생님들은 당국의 지침대로 따른다고 하더라도 지금보다 복잡한 행정업무를 떠안게 될 테고 그만큼 귀찮은 일도 많아질 것입니다.
그럴 때 자칫 피해를 보는 당사자는 제도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해 현명한 선택을 하지 못하는 학생입니다.
자신의 특성을 무시하고 남들 하는 대로 무작정 따르다 보면 고교 학점제를 잘 활용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학원 선생님이 수학이 입시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이라고 말하더라도 무작정 높은 수준의 수학을 수강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본인에게 중요한 과목은 자신의 적성과 진로에 달려있습니다. 물론 이과 전공의 인기가 높은 게 세계적 추세이고 우리나라는 유난히 수학 과목의 난도가 높기 때문에 수학 잘하는 아이가 좋은 대학교 인기학과에 진학할 확률은 높습니다. 하지만 수학 못하는 아이가 무작정 높은 난도의 수학에 올인하면 오히려 입시에서 불리해질 수 있습니다.
나는 캐나다에서 사는 동안 내가 관리하던 유학생들과 내 둘째 딸의 고등학교 생활을 통해 고교 학점제를 어느 정도 이해했습니다.
한국의 고교 학점제가 캐나다의 것을 그대로 따른다고는 볼 수 없지만 현재 발표된 내용을 들여다보면 기본 바탕과 방향성은 캐나다의 것과 거의 유사합니다. 게다가 여러 매체에서 고교 학점제의 우수 사례로 캐나다(온타리오주)의 고등학교 시스템을 거론하고 있으니 내 안목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닌 듯합니다.
나도 캐나다 고등학교 교육제도를 처음 접하고 제법혼란스러웠습니다.
많은 분들이 대학교 수강 신청과 고교 학점제를 비슷한 개념으로 설명하곤 하는데 오히려 고등학교 학점제가 더 까다롭고 조심스럽습니다. 어떤 과목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진학할 수 있는 대학교와 전공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진학할 학교와 전공의 목록을 정하고 그에 맞는 교과목을 신청해야 합니다. 이걸 얼마나 일찍 계획하고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 대학 원서의 질이 결정됩니다. 결국 전공 적합성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만약 저학년 때 수강해야 할 과목을 이수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의 과목 수강신청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름 방학 때 특강을 듣거나 심지어 다른 학교, 또는 온라인 강의를 들어서 학점을 따야 합니다. 수강 신청을 해서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예상보다 수업의 난도가 높아 점수받기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수강을 포기하고 다른 과목으로 옮겨 듣기도 합니다. 현재 한국의 고등학교 수업 선택 과정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캐나다의 경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행된 제도라서 자리가 잘 잡혀있습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에 맞는 선택을 하기 위해 진로 지도 선생님을 찾습니다. 아마 학기 초에 학교 내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진로 지도 선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형 고교 학점제는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까요. 캐나다 학점제를 바탕으로 유추해 보겠습니다.
한국도 이미 공통과목과 선택 과목, 진로 선택 과목이 있기 때문에 고교 학점제가 시행된다고 하더랃느 드라마틱한 변화가 예상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교실 이동 수업이나 담임제 폐지에 적응하는게 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모든 혼란을 감수하고라도 고교 학점제가 필요한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1. 적성을 고려해 진로를 정하고 그에 필요한 공부를 좀 더 심도 있게 할 수 있다.
고교 학점제가 기존의 방식보다 바람직한 이유는, 자신의 진로에 필요한 공부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고교 학점제가 시행되면 원하는 진로와 적성에 맞춰 꼭 하지 않아도 되는 공부와 반드시 해야 할 공부가 아이에 따라 다르게 정해집니다.
기본적으로 공통수학, 공통 국어, 공통 영어, 공통 역사 등 기초 소양에 관련된 공부는 마치 대학교 때 배우는 교양필수처럼 누구나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과목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국어의 갈래인 독서, 문학, 연기나 화법, 창작, 언어 등으로 나뉘고 제2외국어(영어)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난도에 따라 세분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수학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다양한 학점 과목으로 세분화될 것입니다. (물론 교육 당국이 꼼꼼히 준비를 하지 못한다면 시행 초기에는 실효성이 없는 일이 되겠지요.)
--상경계열이나 문과 계통으로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이 이과 또는 공학 계통으로 진학하고자 하는 아이처럼 심도 있는 이과 과목을 이수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물리학과에 진학하고 싶은 아이가 반드시 문학을 심도 있게 공부해서 높은 학점을 받아야 할 이유도 딱히 없습니다.
--마치 대학교 때 전공 필수 과목증 먼저 이수해야 다음 단계의 필수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특정한 과목을 선택하려면 전 단계에서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과목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진학하고 싶은 학교에 따라 반드시 수강해야 할 과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캐나다의 경우 건축 공학을 전공하는데 어떤 학교는 물리 과목을 이수해야 지원할 수 있지만 어떤 학교는 물리를 이수하지 않았어도 지원할 수 있습니다.
지원하고자 하는 학교의 수준이나 교육 목표에 따라 반드시 이수해야 할 과목이 입시 요강에 명시될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명문 대학교일수록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서 입시요강이 세분화되고 까다로워질게 분명합니다.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치를 매 학기마다 확인하며 진로를 수정해야 할 수 있습니다. 목표 학교에 맞춰 학점을 이수했는데 그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면 자칫 진로를 바꿔야 할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도 교사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교과목을 자기가 직접 선택한 만큼 모든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교 학점제에서 중요한 과목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학생의 선택에 따라 결정됩니다.이과 계통으로 진로를 정했다면 좀 더 세분화된 고등 수학, 과학 등의 학점을 이수하고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고 문과 계통의 진로를 결정했다면 그에 맞는 학점 이수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적성 가지치기를 통해 대학교에 진학하면 대학교 공부에 적응하기 쉽습니다. 대학교 진학 후에 전공 선택을 후회하는 일이 줄어들게 되겠지요. 대학교 교수들 입장에서는 가르치기 쉬운 학생을 선발하기 좋은 제도입니다.
2. 자신의 실력에 맞는 공부를 할 수 있다.
한국은 학년에 따라 모두 다 같은 책으로 비슷한 수준의 공부를 합니다. 100점 맞는 학생도 0점 맞는 학생도 같은 교실에 앉아 있어야 합니다. 100점 맞는 학생은 지루할 수 있고 0점 맞는 학생은 의미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셈입니다. 100점 맞는 학생에게는 더 높은 수준의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학업 성취도가 낮은 학생에게는 그에 맞는 수업을 듣게 함으로써 적당한 진로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게 바로 고교 학점제입니다.
--예를 들면 수학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이 언어 영역이나 문과 계통의 과목은 필수 학점만 이수하고 수학이나 과학에서 이수할 수 있는 최고 높은 난도까지 수강한 후, 학교 밖의 다른 기관에서 더 높은 과정까지 이수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명문대를 목표로 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대학교에서 배우는 과정을 선이수 합니다. 그게 AP입니다.우리나라도 AP와 비슷한 대학 선이수 프로그램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상위권 학생의 경쟁은 더 치열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AP처럼 대학 수학을 고등학생이 수강할 수 있게 된다면 이과 계통의 진로를 선택한 상위권 아이들 다수가 수강 신청을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수한 아이들끼리 모여 우열을 가려야 할 테니 당연히 경쟁도 치열해지겠지요.
--반대로 학습능력이 낮거나 진로의 특성상 공부보다 다른 것에 집중해야 하는 학생들이라면어려운 과목을 이수하는 대신 진로에 맞는쉬운 과목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캐나다의 경우 한국의 중학교 2~3학년 수준의 수학만 이수하고 고등학교를졸업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진학할 수 있는 대학교의 폭이 아주 좁아집니다.
하지만 필요 없거나 능력이 안 되는 공부를 한답시고 수강 신청을 하고 수업 시간에 딴생각하거나 졸면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바깥으로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운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캐나다의 경우는 고등학교 때 원하는 산업 현장에 실습을 나가는 제도가 있고 당연히 학점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고교 학점제가 자칫 한국 사회에서 꾸준히 거부되어 왔던 우열반의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열반은 학생의 수준을 학교 당국이 학생의 점수를 기준으로 강제로 분반을 한 것이라면 고교 학점제는 학생 스스로 자신의 능력에 맞는 반을 선택해 수강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학업 성취도가 낮은 학생이 용감하게 높은 수준의 과목을 수강할 수도 있고 학업 성취도가 높은 학생이 요령껏 경쟁이 약한 과목을 수강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3. 과락은 면해야 졸업을 할 수 있다.
문제는 본인이 선택한 과목에서 과락을 한다면 졸업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대학교 때 F를 받은 학점은 재 수강을 해야 했던 것처럼 이제 고등학생도 기준 이상의 점수를 받지 못하면 재수강을 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점수를 높여야 합니다. 예전에 수포자, 영포자라고 하더라도 성적 상관없이 출석만 충실히 하면 졸업할 수 있었다면 이제 '기본'은 해야 졸업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다만 당국의 발표대로라면 다양한 방식으로 학점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졸업은 시킬 것 같습니다. 어쨌든 중학교 때부터 수포자 영포자로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면 제 수강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영어와 수학의 기본 이수 과목의 경우 난도를 낮출 가능성이 높습니다. 캐나다의 경우도 누구나 다 이수해야 하는 필수 과목의 난도가 한국에 비해 낮은 편입니다.
다만 영어(공통 언어-우리로 치면 국어)의 경우는 의외로 난도가 높아 점수받기가 가장 어려운 과목입니다. 사실 캐나다의 경우는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여깁니다. 초, 중, 고등학교 전 과정을 통틀어 읽기 말하기 쓰기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요즘 우리나라에서 유행처럼 회자되고 있는 문해력, 이해력, 사고력, 소통 능력 등등은 모두 국어 능력에서 나온다는 점을 상기하면 캐나다 학교가 영어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전공을 선택하든 국어 능력이 없이는 공부를 할 수조차 없습니다. 심지어 대학교 진학을 하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국어능력이 없는 사람이 사회생활을 잘하기는 어렵습니다. 고등 수학이나 높은 레벨의 제2외국어는 필요한 사람만 공부하면 되지만 국어는 누구나 해야 하는 필수 과목입니다.
이게 고교 학점제의 장점이냐 하면, 그렇습니다. 적어도 고등학교를 졸업 한 사람이라면 알아야 할 기본 소양은 반드시 가르쳐서 졸업시키겠다는 교육당국의 의지가 보입니다.
현재 초등학생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한국의 학부모들은 아이의 적성을 무시하고 취업이 잘 될 전공을 선택해 진학시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연히 학생들은 자신에게 맞는 과목보다 원하는 전공에 진학이 유리한 교과목을 선택할 것입니다.그러니 고교 학점제가 시행된다고 하더라도 인기 있는 과목에 쏠림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입니다. 어쩌면 고교 학점제가 시행된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방식에서 큰 변화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서 이야기한 대로 학업 성취도가 아주 높아 좀 더 도전적인 과목을 수강하고 싶은 학생이나 진로 특성상 특별한 과목을 이수하는 게 유리한 학생, 또는 다른 학생들이 듣는 수업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수강하다 보면 시간 낭비를 하게 될 학업 성취도가 낮은 학생들에게는고교학점제가 제법 실효성 있게 적용될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에게는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적성대로 수강 신청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공부하기는 좀 더 편안 해질 수 있습니다.
다만 적성에 맞지 않는 진로를 선택하고 그에 따라 수강신청을 한다면 내신점수를 잘 받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가 어릴 때부터 적성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해야 해야 합니다. 아이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공부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고교 학점제보다 앞서야 하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
당분간은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적성을 무시하고 인기 있는 진로, 유명 대학교를 포기하지 못할게 뻔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의 이름에 연연하기보다 자신에게 맞는 학교를 선택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은 모두 같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모두 일류 대학교에 갈 수 없고 모두 인기 있는 직종에 종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조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인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즐기면서 할 수 있다면 일류 대학교 나와 인기 있는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더 큰 성취감을 느끼며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들이 암벽등반을 한다고 해서 나도 따라서 암벽등반을 할 필요는 없듯이 다른 아이가 미적분을 공부한다고 해서 실력도 안 따라주는데 반드시 미적분 과목을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어 문장 읽기가 쉽지 않은 학생이 영어권 문학 읽기 과목을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게 바로 고교 학점제의 요지가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