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오자마자 고량주 몇 잔을 연거푸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잠을 잤다.
오랜만이었다. 연구실에서 일찍 나와 집으로 돌아온 것도. 술을 입에 댄 것도. 그리고 꿈을 꾸지 않고 개운하게 잔 것도. 잠결에 이 평온함이 너무 좋아 내일도 쉬어야만 하겠다고 다짐했다. 내일이 목요일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일 년 동안 달리기만 했으니 나도 쉬어도 된다는 마음은 붓을 빠는 물통에 첫 물감이 닿았을 때처럼 빨리 퍼졌다. 금세 더러워졌다.
버릇처럼 일어나 메신저와 이메일을 확인했다. 뭔가 분주했다. 허리케인이 온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대략 목요일과 금요일은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주 분했다.
나는 나의 자유 의지로 내일의 쉼을 선택한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 쉼은 모두의 것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출근하지 말라는 이메일은 아주 좋은 핑계거리가 되겠지만서도 나는 그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총기있는 반항은 미수에 그쳤다. 나는 이 작은 세상에 쿠데타를 일으키는 혁명가가 아니라 그저 허리케인이 무서워 방 안에 숨는 아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허리케인은, 태풍과 달랐다.
그러니까 정의가 달랐다는 것이다. 허리케인이나 타이푼이나 같은 것인데 만들어지는 위치가 다르단다. 위치가 다르면 뭐가 다르겠냐만 그냥 처음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비가 왔다. 오랜만에 씻지도 않은 채로 아침을 마주하고 문을 열어두고 멍하니 비를 봤다. 아마 벌레 몇 마리가 집안에 들어왔을지도 모르겠다. 홀린 것 처럼 차를 끓이고 책을 가져왔다. 비는 점점 미친 사람처럼 발악을 하고 있었지만 문은 닫지 않았다. 책을 몇 자 읽었지만 이내 덮었다.
그러니까 책과 차와 비 정도면 그저 행복했던 것은 과거 아니면 한국 땅에 버리고 와버린 것이다.
이내 펑펑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내가 가장 자신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우는 것이겠다.
그래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카카오톡에 있는 의미없는 글들을 조금 읽어보려다가 포기했다.
나는 내가 조금은 고장났다고 느꼈고, 고장이 아니라 지친 것 같다는 결론에 다다랐으나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비는 밤새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