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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ngyouth Apr 10. 2019

3편의 영화들의 엔딩들

2019년 3월부터 4월까지 본 영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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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리도 글을 못 쓰면서 글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다른 문제라 함은 브런치가 글 쓰는 맛은 확실히 있는데 전에 쓴 3편의 영화 글들이 생각보다 길어서 짧은 글을 쓰는 것이 영 어색하다는 것이다. 어영부영하다가 아무 글도 못 쓸 것 같아 이런 글이라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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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3월부터 4월 10일 현재까지 본 영화들 중에 "올해의 영화 리스트"에라도 올리고 싶을 만큼의 훌륭하고 좋았던 영화들이 참 많았다. 그중에 몇 편을 골라 트위터에서나 떠들법한 이야기를 무게 잡지 않고 가볍게 써보려 한다. 이야기할 영화들이야 차고 넘치기에 그래도 기준은 세워야겠다. 엔딩에 대해 10줄 이상(?) 떠들 수 있는 영화들을 골라 글을 써보려 한다. 엔딩에 대해 쓸 것이기에 스포일러가 가득하겠다. 볼 사람도 적을 테고, 꽤나 공적인 브런치지만 나는 사적으로 사용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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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미션 The Mule> (2018)

꽃이라니. 아니 진짜 꽃이 마지막 장면인 것인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얼은 결국 죗값을 치르고 감옥에 가게 되는데 감옥에서도 그는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꽃을 심을 수 있게 된다. 지인도 의뭉스럽다고 했지만, 나 역시도 이 엔딩을 보면서 혼란스러워졌다. 감옥에 갇히긴 했지만, 그는 결국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니 이는 명백하게도 얼에 대한 처단이 아 얼의 해피엔딩이 아니겠는가. 재판정에서의 장면 역시 의뭉스럽기 그지없다. 시스템으로서 법의 심판을 받고야 있지만, 변론을 포기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함으로써 얼은 얼마간 법의 심판으로부터 빗겨 난다. 얼을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스스로에게 유죄를 내리는 자신뿐이다. 조금 더 앞으로 가보자. 얼이 곧 죽어가는 아내와 함께하는 장면에서 그는 눈물을 흘린다. 지난날을 마치 반성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다. 이때 눈물은 아내를 위한 것인가 혹은 자신을 위한 것인가. 그 둘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손쉬운 가능성은 접어두자. 오히려 얼의 눈물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자기를 위해 자신의 자의식이 흘리는 눈물처럼 보인다. 그것이 병든 아내를 위한 것이 아님은 영화 내내 그려지는 얼의 욕망들을 보고 있자면 충분히 간파할 수 있지 않나. 글쎄 영화 속 보이지 않는 시간과 공간에서 그가 어땠는지는 결코 알 수 없으니, 처음서부터 그가 가족을 위한답시고 하는 일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일에 다름없게 영화가 그리고 있지 않나. 그래서 집에 돌아온 순간에 그가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미안함으로부터 나오는 눈물이라는 생각을 떨쳐 내기 어려운 것이다. 이 눈물과 아내의 죽음으로 그가 얻게 된 것은 남은 가족과의 뜬금없는 화해다. 샤브롤이었다면, 이런 아버지와 화해할 바에야 총을 겨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알고 보니 아내도 꽃을 좋아했고, 어쩌다 보니 딸은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라스트 미션>에서는 철저하게 자기-비판과 자기-반성과 자기-구원이 이뤄진다. 영화는 얼이 그렇고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철저히 알고 있기에 자기-비판적 태도를 선보인다. 내가 느끼기에 이 영화는 마치 자기-비판이 이뤄졌으니 됐지?라는 태도로 넘어가 버리는 것 같다. 얼이 자기-반성을 하고 있잖아, 됐지? 그런 까닭에 영화는 얼이 자기 자신에게 심판을 내림으로써 오히려 자기-구원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감방에 들어갔지만 그는 가족과 화해도 했고, 그토록 좋아했던 꽃도 기를 수 있게 됐다. 얻으면 얻었지, 그가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흔들리는 구름 The Wayward Cloud> (2006)

 처음으로 차이밍량은 못된 인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모로 이 영화는 극단에 서 있다. 표현도 표현이지만, 특히 그 정서가 그렇다. 차이밍량이 짚어내는 허무함의 타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거의 그 정서를 장외홈런 시켜 버릴 정도로 밀고 나간다. 사실상 파울에 가깝지 않나 싶기도 한데. 물론 이를 영화 전반에 걸쳐서 이야기할 깜냥은 없다. 엔딩에 나오는 포르노 촬영 장면과 이어서 나오는 오랄 섹스(아니 이건 섹스가 아니니 뭐라 불러야 좋을까) 장면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엔딩에서 극대화되는 허무함과 외로움은 그 전 장면들이 쌓아지지 않았다면 그토록 사무치지 않았을 테니 엔딩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테다.

 굳이 나눠보자면 이 엔딩에는 두 개의 (신체) 접촉이 있다.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의심이 되는 뻗어버린 AV 여자 배우와 이강생 사이에 일방적인 섹스가 일어난다. 저기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들어설 수가 없다. 몸뚱어리가 단지 격렬히 움직이는 것에 다름 아닌 이 섹스는 포르노 감독의 카메라를 통해 익명의 누군가들에게 그 허무함을 전염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 미친 광경을 주인공 여자가 바라본다. 주인공 여자가 이강생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거의 실패에 가까웠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강생이 다소 조심스러워 보였고 그래서 신체 접촉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는 그가 접촉의 허무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여자 주인공은 허무하기 그지없는 괴상한 포르노 촬영 현장을 바라보는데, 더욱 괴상하게도 주인공 여자가 뻗어버린 여자 배우를 대신해 신음을 내지른다. 접촉 없이도 흥분은 전염될 수 있는 것이니까 이 신음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이 신음은 흥분의 신음일까 절규의 신음일까. 허무함이 절정에 이를 때, 몸뚱어리는 얄궂게도 흥분의 절정에 이른다. 바라보는 여자와 포르노의 현장이 벽으로 가로막혀있지만 역시 여기에도 "구멍"이 있어서, 여자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고, 이강생은 사정의 순간에 그 "구멍"을 뚫고 다시 여자의 "입구멍"에 발기된 음경을 처박아버린다. 이로써 여자가 원하던 접촉이, 두 번째 접촉으로 발현된다. 이 두 번째 접촉이 첫 번째 접촉보다 더 음울한 까닭은 그렇게 원하던 접촉이 이뤄졌는데도 여기에도 역시나 사랑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구멍>에서 구원으로 작용했던 구멍은 막혀져버렸다. 역시나 <구멍>을 뚫 나온 몸뚱이는 구원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허무함만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Consenting Adults> (1992) 

 이웃의 아내를 탐하던 주인공과 그의 부인은 사건을 함께 해결하고 다시 결합한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에서 이들이 이사한 새로운 집이 등장한다. 그래,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인생을 펼칠 만도 하지. 여기 까지라면 전형적인 해피엔딩이었을 테다. 파큘라라면? 이삿짐으로부터 새로운 집으로 화면이 점점 멀어진다. 새로운 집이 드러날 즈음에 다시 또 화면이 멀어진다. 아니 옆집이 없잖아. 저게 뭐람. 파큘라라면? 화면이 다시 또 멀어진다. 옆집만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을이 없다. 이들의 집은 푸르디푸른 광활한 평원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저기에는 이웃이 없고, 마을도 없고, 주인공들의 집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카메라는 익스트림-롱-숏으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새로운 집을 조그만 점으로 잡아내고, 그래서 보이는 것은 넓디넓은 대평원 자체다.

 이웃의 아내를 탐하는 그 따위 욕망은 갖지도 말라는 교훈 시전처럼 보이는가. 아니 이것은 마크 피셔의 분석을 따와, 사건의 진짜 원흉이었던 자본주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씁쓸한 결말처럼 보인다. 인간이라면 사회적 삶을 누려야 할진대, 이들 부부는 사회적 삶이 불가능한 고대적의 이상한 공간으로 유폐된다. 저곳은 이상한 곳이기에 이상향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건이 해결됐지만, 이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 이웃도 뭣도 없는 저곳에서의 삶이 정말로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영화의 엔딩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자본주의가 일으킨 비틀린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곳은 저런 곳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 사회적 삶을 꾸릴 수 있을 것이란 꿈도 꾸지 말라. 다시 말해, 사회적 삶은 이미 자본주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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