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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ngyouth Jan 04. 2019

신상옥 영화보기 1: 뻔한 영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 [신상옥 영화보기 1]은 신상옥의 영화를 차근차근 이야기하겠다는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그저 기회가 되는대로 신상옥 영화를 계속 보겠다는 다짐 비스무리한 것일 뿐이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뻔하다. 비단 <어느 여대생의 고백> 뿐이겠냐. <로맨스 빠빠>, <로맨스 그레이>는 소위 신파적('신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고찰해볼 만하다. 글자 그대로의 신파와 소위 신파적이라 부르는 신파가 얼마나 붙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역량의 부족 탓에 나 역시 여기서는 모두가 쉽사리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신파라고만 부를 수밖에 없다. )이고, <쌀>의 눈물겨움은 당혹스러울 정도다. 60년 전 신상옥의 영화가 뻔하다고 말할 때, 그 뻔함의 감각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감히 추측컨대, 이 뻔함이란 한국 TV 드라마와 한국영화를 볼 때의 기시감이다. <국제시장>의 최루성, 한국 드라마의 어떤 흔한 해피엔딩들. <어느 여대생의 고백>의 뻔함의 근원은 한국 드라마와 한국영화에서의 그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말은 시간적으로 모순이다. 50년대 영화의 뻔함이 21세기 드라마와 영화의 뻔함으로부터 나올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는 이렇게 바꿔 말해야 할 것 같다. 오늘날 쏟아지듯 양산되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뻔함은 신상옥 영화로부터 기인해있다고. 그리고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의 작품들은 신상옥이 해오던 것으로부터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다시 신상옥 영화의 뻔함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신상옥 영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의 뻔함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변호사가 된 최은희(최소영 역)가 여자 죄수 황정순을 위해 변론하는 장에서 논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인다. 감정으로 뒤범벅된 최은희의 변론은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을 감화시켜버린다. 변론이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 최은희는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계선(양어머니 역)에게 "자신은 법의 심판을 받지는 못했으니 양심의 심판이라도 받아야 한다"라며 집을 떠날 채비를 한다. 그런 양어머니는 최은희를 얼싸안고 최은희를 용서한다. 최은희의 그 감동적인 변론 탓이다. 양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이 집에 남아있어야 하며, "아버지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뒤이어 아무것도 모르는 다리불구 아버지(김승호)가 또 역시 변론의 감동이 가시지 않은 채 최은희를 찾는다. 극적인 화해를 이룬 양어머니와 최은희가 모습을 드러내고, 아버지 김승호가 계단 난간을 짚으며 올라온다. 마침 아버지를 따라 들어온 최현(상호 역)과 최은희의 눈이 마주치고, 사랑의 스파크가 인다. 최은희는 김승호를 부축하며 내려오고, 화해와 사랑의 메시지가 강력히 뿜어 나오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의 변론부터 엔딩까지 이어지는 이 극적인 해피엔딩은 버거울 정도다. 그러나 묵직한 감정으로 똘똘 뭉친 이 시퀀스는 어딘가 허술하다. 가령, 양어머니의 태세 전환은 설득될만한 것인가. 그는 최은희의 정체를 의심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최은희가 살았던 하숙집에 굳이 고급 양장을 차려입고 방문하기도 하고, 최은희의 절친이자 최은희가 김승호의 딸로 위장하는 데에 일등공신 역할을 한 김숙일(희숙 역)을 찾아가 '사건'의 전모를 알아내기까지 했다. 이런 양어머니가 비밀을 폭로할 타이밍을 엿보고 있던 차에 변론이 진행됐고, 양어머니는 그 변론이 최은희의 자기 고백에 다름 아님을 깨닫고 결국 최은희를 딸로 받아들인다.


영화는 양어머니가 비밀을 폭로할 '악역'처럼 보이도록 공들였지만, 사실 양어머니가 악역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다시 최은희가 이 집에 들어오게 된 경위를 살펴보자. 신분위장에 성공한 최은희가 결정적으로 집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신분세탁이 성공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편 김승호가 부인 유계선에게 구구절절한 사연을 털어놓은 뒤 그의 동의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의 과거를 털어놓으면서 과거는 과거이고 최은희를 딸로 받아들이자고 제안하는 장면에서 부인 유계선의 말은 다음과 같다.


"남자분들은 참 편리하군요. 지나간 일이라고 그렇게 다 쉽게 잊을 수 있으니. (중략) 과거의 있었던 일이나 앞으로 일어날 일이나 죄악은 죄악이에요. (중략) 버림받은 그 여자의 혼이 소영이라는 애를 통해 당신에게 복수하는 것이에요. 그야말로 인과업보죠. (중략) 내 마음에 불쾌한 상처를 준 당신의 과거에 복수하기 위해서도 나는 거절해야죠. 하지만 데리고 와야죠. 그건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책임이니까요."


이로써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양어머니가 말하듯 인간 된 자로서의 도리,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류애다. 그러나 신상옥의 다른 영화를 살펴봤다면 유계선이 최은희를 받아들이는 데에 다른 요인이 작용하고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부인이 남편에게 위와 같은 말을 하기 전, 그는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고 말한다. 이 말을 통해 부인 유계선이 수호하고자 하는 것은 '가족'임을 추측할 수 있다. 남편이 다른 여자가 생겨 가족이 붕괴하는 것보다 새로 딸을 거둬들여 가족을 지켜내는 것이 부인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새로 딸을 들임으로써 구성원이 더해지는 것은 가족이 더욱 강화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추측은 신상옥의 영화를 살펴봤다면 더욱 신빙성 있는 것이 된다. <로맨스 빠빠>에서 실직한 아버지는 능력불구임에도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믿음과 사랑으로 가족 안에서 포용된다. <로맨스 그레이>에서 불륜을 저지르는 아버지는 윤리불구이고 그래서 그 가족은 붕괴되기 직전까지 이르나 역시나 그 아버지는 원래의 집으로 회귀하고 다시 가족은 봉합되고 만다.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에서 역시 원래부터 가족을 이루던 인물들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신상옥의 영화를 몇 편 보지 않았음에도 감독 신상옥이 가족을 수호하려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감지된다. 이 연장에서 <어느 여대생의 고백>에서 역시도 가족은 수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인이 최은희를 딸로 데리고 오는 것에 동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지막 장면에서 양어머니가 최은희의 비밀을 폭로하지 않는 것 모두 감독의 가족 수호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신상옥 감독이 <어느 여대생의 고백>에서의 가족 봉합을 이 영화에서만 선보이고 말았더라면, 나에게 그것은 뻔한 촌스러움, 혹은 구시대적 보수관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상옥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서 역시 가족 수호라는 주제가 반복적으로 포착된다면 그것은 테마가 된다. 그래서 나에게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뻔한 영화가 될 수 없었다. 이 영화는 신상옥의 영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영화로서 뻔한 주제라고만 퉁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레 떠오를 수밖에 없다. 왜 신상옥은 가족을 붙드는 것인가. 아마추어 감상기에 불과한 지금의 글쓰기로는 한 가지 생각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신상옥은 한국전쟁 전후의 영화감독이었다. 감독에게 가족의 흩어짐과 그로 인한 가족의 붕괴는 전쟁이라는 역사적 현실로 언제나 널려 있던 것이었을 테다. <로맨스> 시리즈(<로맨스 빠빠>, <로맨스 그레이>)를 비롯해 <어느 여대생의 고백>에서 남성은 비정상적으로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지만, 가부장 남성은 '불구'에도 불구하고 가족 속에 계속 포섭되는 이 아이러니는 신상옥에게 가족을 붙들어야만 하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애초부터 유계선이 최은희를 딸로 받아들일 때 표면적이긴 해도 인간됨이 언급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본다면 양어머니가 최은희의 출생비밀을 파헤치고 다니는 행위들은 그가 최은희를 용서하는 것에 얼마간 설득력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 그가 출생비밀을 파헤치고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들은 최은희의 자기고백적 변론과 만나면서 그가 최은희를 더욱 이해하게 되는 것으로 작용하게 된다. 정말이지 양어머니의 용서는 급작스런 태세 전환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밀을 파헤치면서 그는 최은희의 계급적 상황을 알게 된다. 가족을 수호하려 한다는 추측을 배제하더라도 인류애를 말하던 유계선이라면 여자 죄수의 변론 속에서 드러나는 최은희의 자기고백을 듣고 그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의 분위기가 갑자기 가족애, 인류애로 흐르는 것이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면,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더 이상 뻔하다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더욱이 감독이 <어느 여대생의 고백>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재간을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일단 언급해보고 싶은 것은 최은희의 변론 장면에서 진행되는 여자 죄수의 일생을 다룬 플래시백 장면이다. 설명 투성이에 감정 범벅인 이 변론은 뻔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물론 플래시백이라는 효과 자체가 지금에서는 관습적으로 사용되긴 한다만. 이 영화 속 플래시백은 가히 레미제라블을 방불케 한다. 여자 죄수 황정순의 일대기에서 당시 한국 여성의 일생은 황정순 개인만의 것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한강변으로 짐작되는 빨래터와 공장 현장에서 여성의 노동이 등장할 때 그것은 리얼리즘적 감각으로 포착된다. 눈 내리는 밤 장면의 아름다움은 황정순의 고단한 일생을 더욱 비극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짤막한 플래시백이지만 이 플래시백이 호소하는 감정은 제대로 먹힌다. 그리고 이 플래시백 속 황정순의 일대기는 이를 읊조리는 최은희가 겪었을 일생이었을지도 모를 것이고, 김승호가 버린 여자의 일생이었을 것이고, 플래시백 속 배경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일생 그 자체로 겹겹이 포개진 채로 감지된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 플래시백 장면



최은희가 국회의원 김승호의 집에 딸로 들어가 변호사로 성공을 하고,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양어머니가 최은희의 거짓말을 용서한다는 해피엔딩 식의 이야기는 이야기만으로는 뻔하기 그지없다. 다소 평범해 보이는 이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까. 신상옥 감독은 흥미로운 설정 하나를 뻔한 이야기에 더해 두었다. 최은희의 친구 김숙일은 최은희로부터 "밤낮 탐정 소설만 읽더니 정말 돌았구나."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제안을 그에게 건넨다. 김숙일은 자신이 찾아낸 일기 "심경(心境)"에 대해 이야기한다. 국회의원 최림(김승호)과 혼외 관계를 맺었던 여자가 일기의 주인공이고, 일기에 따르면 그에게는 김승호 모르게 낳은 딸이 있다. 실제 여자와 그 딸은 모두 죽어버렸지만 최은희가 동성동본을 이용해 그 딸로 위장해 김승호 앞에 등장한다면 최은희는 지금의 가난한 신세를 면하면서 공부를 계속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김숙일은 이와 같은 설정을 자신의 탐정 소설 이야기의 뼈대로 세워 두었음은 물론 실제로 국회의원에게 편지까지 보내 두었다고 말한다.


영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김숙일이 제안한 이 설정을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최은희는 방세를 내지도 못하고(하숙집 주인 남자는 최은희에게 치근덕거린다.),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는 형편(일자리를 구하러 간 곳에서도 남자 직원은 최은희에게 치근덕거린다.)에 결국 김승호를 찾아간다. 이 만남은 불발되고 만다. 터무니없는 설정임을 영화 스스로도 알고 있다는 듯. 그러나 거리를 배회하던 중 최은희는 사고를 당하고, 김승호는 김숙일이 보내 둔 편지가 계속 맘에 걸려 수색을 하던 중 자신을 방문했다던 그 여자가 자신의 딸 소영임을 알게 된다. 마치 김숙일이 짜 놓은 각본대로 영화는 흘러간다. 그리고 앞서도 말했지만 이 비밀은 양어머니에 의해 발각될 위기를 몇 번이나 겪으면서, 영화는 최은희의 변론 장면에까지 이르게 된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이 신분위장과 비밀발각이라는 설정을 통해 김숙일이 주구장창 읽어댄 탐정소설 같은 재미를 선사한다. 가족을 붙드는 감정적 결말부에 다다르기 전까지 영화는 이 서스펜스를 활용하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더불어 여자 대학생이라는 지위를 통해 당시의 계급적(?) 상황과 젠더적(?) 상황 모두에서의 어려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어느 여대생의 고백>이 획득해내는 성취라고까지 볼 법하다. 가족애라는 주제가 뻔하게 느껴지는 것에 반해, 이야기의 전개 과정은 장르적 재미는 물론이고 꽤나 설득력 있게 계급과 젠더를 드러내고 있으니 이만하면 이야기 자체를 뻔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할 만큼 영화 자체가 충분히 그것들을 담아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여대생의 고백>이 자신의 이야기가 뻔하게 느껴지지 않게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또 한 가지 <어느 여대생의 고백>이 뻔하지 않은 점을 덧붙이자면, 감정에 겨운 최은희의 변론이 끝난 뒤에 많은 사람들(굳이 제한하자면 그의 가족들)이 그 변론에 감동했다는 식으로 영화가 그려지고 있지만, 실상 그 변론의 결과가 어떠한지는 영화가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 변론이 너무나도 감정적이어서 변호사 최은희의 데뷔로서 그것이 적절한 것이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아마 영화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떤 변호사가 그렇게 감정적으로 변론을 하나. 글쎄 아마 최신한국영화라면 그 변론 다음에 무죄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영화의 결말을 장식했을지도. 헤피엔딩의 궁극기. 그러나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그것까지 담아내지는 않는다. 아니 그것을 보여줄 생각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여자 죄수 황정순은 사람을 살인한 것인데 아무리 정상이 참작되더라도 무죄를 받을 리 만무하지 않겠나. 더욱이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판결의 결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까 그 정도까지의 뻔한 결과로 영화를 마무리시키고 싶지 않았을 테다. 그 변론은 사실상 여자 죄수 황정순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최은희 스스로를 위한 혹은 황정순으로 대표되는 어떤 여성들의 삶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신상옥 감독의 영화를 뻔하다고 퉁치고 넘어가는 것이 아쉬워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봤다. 아마 다른 기회에 신상옥 감독의 영화 이야기를 더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한번, 신상옥 감독 영화의 뻔한 가족 테마의 이유가 감독이 경험한 필연적이고 비극적인 역사적 현실에 있지 않겠냐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와 같은 점에서, 그리고 신상옥이 영화로써 담아내고 있는 생생한 당시의 모습을 통해서 나는 할리우드의 프랭크 카프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글쎄 이 이야기는 좀 섣불리 나오긴 했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제대로 해볼 수 있을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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