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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ngyouth Apr 17. 2019

제1의 혁신으로서 사랑의 탄생

<퍼스트 리폼드>(2017)

(엉망진창인 세상을 두고) 브레송 영화  인물은 "아마도 악마가" 끼어든 탓이라고 말했다. 이때 '아마도'를 지레짐작의 추정 정도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브레송 영화의 원제 <Le Diable Probablement>(1977)에서 'probablement(아마도)'는 십중팔구의 가능성이다. 대체로 확실함에 가까운  언표에는 그럼에도 일 또는 이 할 정도의 여지는 남아 있, 이만큼의 모호함만으로도 주인공을 절룩거리게 만들 수 있었다. 사실 그만큼의 모호함 지닌 진짜 문제는 엉망진창의 원인을 "아마도 악마"에게 둠으로써 손쉽게 문제를 종결짓고 마는 것에 있다. 파국의 원흉이 아마도 악마의 탓으로 돌려진 탓에 진짜 주범들은 도망가버리고, 그 자리에는 무기력만이 남게 되었다. 그로부터 딱 30년이 흐른 시대는 악의 징후는 물론이고 악마의 모습까지 확실해졌다. 악이 확실히 드러나게 된 상황을 앞에 두고 브레송의 무기력을 계승할 여유 따위는 없다. 폴 슈레이더의 <퍼스트 리폼드 First Refromed>(2017)가 언뜻 브레송을 떠올리게 하지만, 브레송과는 확연히 다른 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는 신의 대리자인 톨리 목사(에단 호크)의 입을 빌려 이 세상은 '확실히 악마가' 망쳐놓은 것이라고 언명해내고, 악마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호명해내기까지 한다. 명백히도, 환경파괴로 인한 환경오염은 저 기독교의 세계에서 신의 피조물인 자연이 훼손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악의 징후가 된다. 비단 기독교 세계에만 국한시킬 필요도 없이 환경오염은 누구나가 동의할만한 문제적 징후다. (영화 안은 물론 영화 밖 현실에서 역시) 모두가 환경오염이 문제임을 인지하고 있지만, '구태여' 꺼내 든 주제가 괜스레 낯간지럽다. 환경파괴가 나쁜 것임을 확실히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겸연쩍음과 무기력함이 이 낯간지러움에 달라붙어 있다. '알긴 아는데, 그래서, 뭐, 어쩌자고.' 결코 불가피한 것이 아닌 문제일진대, 불가피한 것처럼 박제되어버린 문제 앞에서, 문제 제기조차 머쓱하게 만들어버리는 감각은 영화의 안팎에 흐르고 있다. 


환경오염이라는 악의 징후가 뚜렷해지고, 환경파괴를 일삼는 기업들이 악마로 정체화되면서, 영화 <퍼스트 리폼드>는 자본주의-욕망을 직접 겨냥하기에 이른다. 자본주의가 낳은 욕망이 악마화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퍼스트 리폼드>는 구태의연한 선과 악의 도식을 다시금 꺼내 들기보다 이 악마의 전방위적 침투로 인해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현실을 상상할 수 없게 된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짚어낸다. 아마도 악마가 자리한 세상은 무기력하기 그지없었고, 점점 팽배해진 무기력은 악마가 확실히 활개침에도 그 악마를 제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욕망-리얼리즘은 교회에까지 들어섬으로써 종교의 세속화 역시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다. 퍼스트리폼드교회가 굿즈나 파는 관광명소로 전락한 웃픈 상황을 통해, 마틴 루터 킹이 만들었다는 찬송가의 메시지는 바래진 채로 그가 똥을 싸면서 노래를 만들었을 것이란 상상을 하며 숨넘어가도록 웃어젖히는 목사를 통해 세속 종교가 맞이한 현실이 드러나고 있다.  


악마적 기업 자본과 결탁한 교회의 어쩔 수 없는 현실보다 안타까운 것은 기도조차 작동되지 않는 교회의 현실일 테다. 언제나 그렇듯 <퍼스트 리폼드>에서 역시 신은 어떤 기도에도 응답하지 않는다. 톨리 목사(에단 호크)가 응답하지 않는 신(deus otiosus)에게 기도를 드리는 대신 택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자문하는 일기-씀이라는 행위다. 신의 대리자라는 목사가 기도 대신 일기-씀을 의례로 삼을 때, 그것은 종교의 세속화로 인해 종교 자체가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얼마간 스스로 내보이는 꼴이 된다. 그러나 일기-씀이 목사에게 새로운 구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희미한 가능성 역시 품어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일기-씀이 기도만큼이나 내면적이면서, 오히려 세속에 물든 기도보다 일면 덜-자본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문에 다시 자문이 이어지고, 성찰이 거듭되다 보면 언젠가 자답에까지 이르게 되지 않을까. 물론, 자답으로 내놓은 결론이 자신에게만 이상적인 형상을 띄게 될 위험성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꿈쩍 않는 신만큼이나 교회 역시 꿈쩍 않는다. 주어진 현실과는 동떨어진 채로 목사만이 문제를 제기하고, 분노할 뿐이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사의 의지가 커져갈수록, 그는 꿈쩍 않은 채로 어쩔 수 없음을 안고 사는 현실을 더욱 마주하게 된다. 더욱이 목사가 악마로 상정한 기업 자본은 그것과 결탁해 있는 세속 교회의 비호 아래 목사가 새로이 설정한 그의 사명을 방해하기까지 한다. 분노가 커져갈수록, 목사의 내면에 사랑과 행복이 들어선 자리가 없다는 사실 역시 점점 드러나게 된다. 그는 회의를 품고, 경멸하고, 분노한다. 믿음은 물론이고 사랑을 잃어버린 목사를 목사라고 칭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깨부수면서 신의 피조물인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는 것은 오늘날 교회가 새로이 설정해볼 수 있는 첫 번째 사역이 될 수 있겠지만, 목사의 첫 번째 사역 역시 그곳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한번, 목사는 악의 확실한 출현 앞에서 그것을 그대로 두고 마는 무기력과 체념을 선보일 수 없다. 타협할 수 없는 세상에 체념하고 마는 것의 결과를 목사는 이미 확인할 수 있었다. 메리의 남편은 머리통이 산산조각 난 채로 극단적 자살을 택했다. 끔찍한 광경에 놀라는 톨리 목사와 달리, 영화는 그 광경을 건조하게 비춰낸다. 메리의 남편이 택할 수 있었던 다른 선택지는 목사에게로 건네 진다. 악을 처단해야 하는 목사는 분노로 무장하지만, 그런 목사의 모습은 지하디즘과 같은 극단주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악의 처단에 앞서는 목사의 첫 번째 사역이란 것은 바로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랑이 선사되는 엔딩은 그런 점에서 뜬금없이 낭만적인 결말이 아니라 응당 이뤄져야 하는 결말이 아닌가 싶다.


자살폭탄조끼를 입고 파국을 만들려는 톨리의 극단적 희생은 답이 될 수 없다. 분노에 가득 찬 목사는 처단하려는 악마 못지않게 악에 가득 차 있다. 그러기에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가 교회에 등장하고야 만다. 극단적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뒤, 톨리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는 다른 극단적 순교를 택하려 한다. 물론 이 무기력의 극단 역시 답이 될 수 없다. 악마가 여전히 활개치지 않는가. 그러기에 메리는 톨리와 만나야만 한다. 메리가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 즉각적으로 자살 시도가 실패하게 되고, 이로써 메리와 톨리의 포옹과 키스가 급진적으로 이뤄진다. 두 번의 실패한 순교야말로 진정한 희생이 된 채로 톨리에게 사랑이 선사된다.


급진적 형태로 등장한 이 사랑이 구원이 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톨리가 사랑을 되찾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사랑의 (재)발견 이후에도 톨리 목사가 추구하는 사역이 계속될 것임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렇게 획득된 사랑은 목사의 혁명을 오히려 꿈꾸게 하고, 기대케 한다. 그가 어떤 혁명에 나서는 것에 앞서서 되찾아야 했던 것은 사랑이었으리라. 이는 그가 목사이기 때문에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스레츠코 호르바트의 말을 빌려오자면, "사랑의 재발명"은 오히려 혁명을 꿈꿀 수 있게 한다. 급진적 사랑의 가능성을 통해 견고하디 견고한 자본주의 현실에 다른 새로운 관계가 상상될 수 있을 테고, 그것이야말로 균열의 시작이 될 수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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