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vingyouth Dec 20. 2018

영화의 뒤편, '통합'을 꿈꾼 배우.   

<슈팅스타>(1928)

안소니 애스퀴스의 무성영화 <슈팅스타>(1928)의 엔딩에는 올해 본 영화 가운데 가장 처연한 롱숏이 등장한다.

<슈팅스타> 속 마지막 장면.

 영화 제작의 뒤편을 그려내고 있는 <슈팅스타>는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라는 명제를 붙들고 있다. 영화는 오프닝에서부터 이 명제를 관객에게 드러낸다. (오프닝에서 부감숏과 롱테이크로 담긴 영화세트장의 전경은 <플레이어>의 오프닝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누가 그걸 모르나. 안타깝게도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영화 속 주인공들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주인공들은 그래서 그들이 출연하는 <슈팅스타> 속 영화를 완벽하게 만든다. 여자 주인공 Annette Benson(Mae Feather 역)은 남편 Brian Aherne(Julian Gordan 역)과 함께 출연하는 영화에서 남편을 실제로 해치기 위해 공포탄이 아닌 실탄을 총구에 넣어둔다. 남편 Brian Aherne이 기둥에 묶여 있는 Annette Benson을 구출하려는 촬영에서 Brian Aherne에게로 총이 발사되기 직전, 여자 주인공은 자신이 저지른 충동의 결과를 알아차리고 "총을 쏘지 마!(Don't Shoot!)"라고 울부짖는다. 실제로 총을 쏘지 말라는 그의 절규는 그러나 영화 속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게 된다. 감독을 비롯한 영화 제작진은 이를 그녀의 대사로 이해해버린다. "쏴!(Shoot!)" 결국 남편에게로 총이 발사된다. 어쩐 일인지 다행히도 실탄은 발사되지 않았고, 여자 주인공의 실감 나는 연기로 명장면이 나왔다며 제작진들은 기뻐한다. 그러나 발사되지 않은 실탄은 이후 더 큰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자 주인공은 왜 남편을 죽이려 한 것일까. 그는 남편과 결혼했지만 사실 슬랩스틱 배우 Donald Calthrop(Andy Wilks 역)을 더욱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남편보다 Donlad Calthrop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비단 그 둘이 외도를 한다는 설정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Donald Calthrop과 밀회를 나누는 순간, 여자 주인공이 출연하고 있는 영화의 제목이 창 밖 건너편 네온사인으로 깜빡이고 있다. "My Man". <슈팅스타>는 Annette Benson의 마음이 누구에게 더 쏠리고 있는지를 영화적으로 보여준다.


 Annette Benson이 Donald Calthrop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남편은 그 영화 My Man 을 보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남편은 아내가 감금된 저택으로 그를 구하기 위해 빠르게 차를 몰고 간다. 이 영화 속 영화에서 감독 안소니 애스퀴스는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편집을 멋들어지게 모방한다. 아내가 감금된 장면(1)에 뒤이어 남편이 차를 몰고 가는 장면(2)이 리드미컬하게 이어진다. 두 장면이 교차적으로 몽타주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장면의 리듬을 간파하지 못할 관객을 위해 안소니 애스퀴스는 친절하게도 하나의 장면(3)을 더해낸다. My Man의 바깥에서 Brian Aherne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장면(3). Brian Aherne이 앉아 있는 자리 뒤로 영화를 보러 온 꼬마 아이 두 명이 박진감 넘치는 장면(1+2)을 보며 박수를 치고 있다. Brian Aherne 역시 그 아이들에 묻혀 영화 속 자신을 향해 박수를 친다. 세 장면이 교차되고, My Man 영화 속에서 Brian Aherne은 창문을 부수고 들어와 아내를 구해낸다. 영화가 끝나고 Brian Aherne은 의미심장한 혼잣말을 한다. "현실도 영화와 같다면 좋으련만..."


 바람은 그에게 불행한 쪽으로 이뤄진다. Donald Calthrop이 Annette Benson로부터 집 열쇠를 건네받는 순간부터,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 세 주인공들은 그들의 현실을 영화와 통합하려 한다. 얼마간 <슈팅스타>는 현실과 영화가 통합되기도 하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가령, Donald Calthrop이 해변에서 영화를 찍을 때, 마침 소품인 열쇠가 준비되지 않았고, 전날 Anette Benson으로부터 받은 열쇠를 소품으로 사용해 영화 제작 과정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가 촬영하고 있는 영화의 대사와 상황은 전날의 밀회와 노골적으로 조응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들은 배우들로 하여금 이상적인 영화와 일상적인 현실이 통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러나 <슈팅스타>는 그것이 그들의 착각임을 드러내 보인다. 제작 현장에는 언제나 재즈밴드의 음악반주가 함께 하고, 제작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줄곧 유쾌하게 웃음 짓지만, 실상 영화 제작이라는 현실은 위험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장소다. 그리고 그 죽음이 발생하는 장면에서 감독 안소니 애스퀴스는 다시 한번 에이젠슈타인의 영화를 소환해내는 것 같다. 이어지는 영화 속 영화의 촬영에서 Donald Calthrop은 해변가 언덕에서 자전거를 타고 굴러 떨어진다. 사고가 발생하는 이 장면은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 계단을 떠오르게 한다. 이 사고로 인해 Donald Calthrop이 죽은 것으로 처리되는데 이때 사실 죽게 되는 인물은 그의 대역을 맡은 엑스트라다. 주인공이 죽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일까. 그렇다면 그를 대신한 엑스트라의 죽음도 다행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영화가 아름답다고 영화 제작의 현실까지 아름다운 것은 아닐 테다. Donald Calthrop은 엑스트라가 죽은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떨궈진 열쇠를 줍고 안도할 뿐이다. 


 Donald Calthrop이 사고 현장에서 빠져나와 열쇠를 들고 Annette Benson의 집에 도착했을 때, 얄궂게도 Brian Aherne 역시 집에 있었고, 금지된 사랑을 나누는 그 둘을 목격하게 된다. 그의 바람대로 영화와 현실이 같아졌지만, 그 상황에서 Brian Aherne은 그가 연기한 배역들처럼 상대를 때려눕히고 다시금 사랑을 쟁취할 수는 없었다. 후에 배우에서 감독으로 전향한 Brian Aherne은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이 되는 것으로 설정된다. 영화와 현실이 결코 통합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이후의 결정이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설정 역시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다른 두 주인공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Annette Benson과 Brian Aherne의 촬영 현장에서 실탄은 발사되지 않았다. 실탄이 여전히 장착된 소품 총은 바로 옆 Donald Calthrop의 영화 현장으로 건너가게 된다. 한창 촬영이 진행 중인 현장은 왁자지껄하고 부산스럽다. 그리고 Donald Calthrop은 여기서 최고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선보인다. 그는 계단을 오르내리고, 심지어 천장에 설치된 샹들리에에 올라타기도 한다. 그를 향해 권총을 겨누는 배우에게 문제의 그 총이 전달된다. 위태롭게 샹들리에에 매달린 Donald Calthrop에게 총이 겨눠진다. 흔들리는 샹들리에. 불안정이 극도로 표현된 이 촬영 장면에서 서스펜스 역시 극도로 고조된다. 탕. 


  Annette Benson이 들것에 실려 나오는 Donald Calthrop을 보게 되고, Brian Aherne은 자신이 아내에게 건네 준 실탄이 총 안에 들어있었음을 알게 된다. 관객보다 늦게 주인공들은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닫게 된다. Brian Aherne의 얼굴에 분노와 허무가 어른거리고, Annette Benson의 얼굴에 좌절과 두려움이 어른거린다. 두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교차되고, 그들의 얼굴 위로 실탄이 덧입혀진다. <조지 수녀 죽이기>(1968)의 엔딩에서 경력과 사랑을 잃고 텅 빈 세트장을 부수며 울부짖는 Beryl Reid 같이 Annette Benson의 세트장 역시 무너지게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슈팅스타>는 조금 더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Brian Aherne은 미국으로 건너가 위대한 영화감독이 되었다. 그가 촬영하고 있는 영화에 뒷모습만 나오는 '아주 평범한' 엑스트라가 필요하게 된다. 뒷모습만 보이는 '평범한' 여자가 급하게 투입된다. 세트장의 조명이 차례로 꺼져가고, Brian Aherne이 촬영을 마친다. 세트장에 남아 대본을 뒤적거리는 Brian Aherne에게로 여자 엑스트라가 다가온다. 그가 Annette Benson으로 드러나지만 그의 얼굴에는 과거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감독에게 말을 건네지만, Brian Aherne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체념하듯 Annette Benson이 떠난다.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두 세계의 통합을 믿은 자의 퇴장. 불꺼진 세트장의 중앙으로 그가 포착된다. 한때 영화판의 주연으로 활약했던 여자 배우가 어느 누구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 채로 누구보다 평범한 뒷모습을 가진 엑스트라가 되었다. 그가 뒷모습을 보이며 세트장을 가로질러 걸어나간다. 세트장의 뒤로. 영화의 뒤로. 세트장의 문을 열자 그의 모습은 자그마한 검은 실루엣이 되어버린다. 올해 본 가장 처연한 롱숏이 아닐 수 없다.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것의 결과치고는 너무 비극적인 결말이 아닐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