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movingyouth
Jun 03. 2019
"L'art du Piksar(삑사리 예술)"의 감독. 봉준호의 신작 <기생충>에서도 어김없이 삑사리가 등장한다. 난장과 비극이 한데 섞인 소동이 지나고, 폭우가 그친 다음 날 "번개"가 기어코 진행되는 그 파티의 현장에서 '충숙'은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충숙은 물론이고 김가네 식구들은 자신들이 지난날 파티를 벌이다 엉망진창이 된 그 현장으로 다시금 소환된다. 이들은 각자 편치 않은 맘으로 파티에 동참하게 되고, 그 와중에 '기정'은 지하실에 갇힌 '문광' 부부를 염려한다. 이런 기정의 염려에 응답해 충숙은 파티를 위해 준비된 음식을 나눠 기정에게 내려 보낸다. 이때, 사모님 '연교'가 끼어든다. 결국 기정은 음식을 들고 지하실로 내려가지 못한다. 이 삑사리는 당연히 의도된 것이다.
가정부 문광의 남편 '명훈'이 지하실로부터 빠져나왔을 때 그는 '기우'의 머리를 산수경석으로 내려친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지하실로부터 부엌으로 올라온 그가 칼을 들고 파티에 난입한다. 부엌에 칼이 있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칼을 든 명훈은 파티 현장에서 기정을 찌른다. 기정은 전달되지 못한 케이크를 손에 든 채로 칼을 맞는다. 기우도 기정도 모두 명훈으로부터 습격을 당했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궁금증이 들었다. 왜 기정은 죽고, 기우는 산 것일까. 돌보다는 칼이 '직빵'으로 작용하는 것일까. 누가 죽고 누가 사느냐. 이 역시 당연히 의도된 것이다.
감독은 캐릭터의 살생부를 쥐고 있다. 기정은 죽고, 기우는 산다. 달리 말하자면, 봉준호는 왜 기정은 (굳이) 죽게 냅뒀고 기우는(굳이) 살려낸 것일까. 정답은 살생부를 쥔 감독의 맘에 있겠지만, 누가 '사느냐, 죽느냐'라는 꽤나 결정적인 문제는 앞서 등장한 삑사리와 떨어질 수 없겠다는 것이 내 나름의 답이다. 내 생각을 밀어붙이자면, 나는 이 둘의 살고 죽음에 저 삑사리, 즉 기정의 실패된 음식 전달을 연결 짓고 싶다. 방어막을 먼저 치자면, 이건 전적으로 내가 과장하고픈 생각에 다름 아니다.
문광네가 신경 쓰이는(염려스러운) 기정의 모습은 파티 준비 장면 이전부터 등장한다. 박사장 저택으로부터 탈출하고 난 뒤에 폭우 속에서 기정은 '기택'에게 이제 어쩔 것이냐고 묻는다. '답도 없는' 상황을 두고 기정은 답을 궁리한다. 이는 계획 따위를 궁리하지 않겠다는 기택의 태도와는 구별된다. 다음날 파티 장면에서 기정이 문광 부부를 염려하고, 음식을 갖고 내려가려는 시도 역시 답을 궁리하려는 시도의 연장처럼 느껴진다. 아주 냉소적으로 보건대, 기정이 음식을 갖고 내려간들 달라질 것은 없었을 테다. 그럼에도 이 문제가 다르게 해결될 일말의 가능성이 기정의 행동에 달리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이를 저지함으로써 다른 가능성을 차단해버린다. 기정이 지하실에 내려감으로써 바뀌게 될 상황은 보여지지 않게 된다.
이때, 기정의 행동이 저지되는 것은 연교의 개입 때문이다. 음식 전달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이 삑사리가 사모님 연교 때문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연교는 악의 없이 이 삑사리에 일조한다. 안타깝게도(?) 다른 가능성이 모색될 수 없는 것을 전적으로 연교 탓으로 돌릴 수도 없게 된다. 계급적인 것을 <기생충>의 세 가족에게 부여해 이야기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연교는 어떤 악의도 없이 하위에 자리한 김가네와 문광 부부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 연대는커녕 생존의 자리를 두고 서로 비슷한 처지에 놓인 김가네와 문광 부부가 맨몸을 부딪혀가며 사투를 벌인다. 갈등과 투쟁이 비슷한 계급 내에서 벌어지게 되는 이 같은 상황의 도래에 아이러니는 없고, 이는 당연한 것이 된 지 오래다. 생존만이 상상되는 자본주의 안에서 아이러니는 감춰지고, 오히려 생존 투쟁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다.
다른 상황을 상상해보려는 기정은 음식 전달에 실패하고 만다. 다른 상황은 상상될 수 없다. 오로지 허용되는 상상이란 영화의 전반에 걸쳐 일관된 기우의 상상이다. 기우는 다분하다 못해 뻔하기까지 한 상징물인 산수경석을 박사장의 저택에까지 짊어지고 온다. 폭우로 침수된 집에서 담배를 피우는 기정이 현실을 자각하고 다른 상상을 궁리하는 것과 달리, 침수된 집에서도 산수경석을 껴안던 기우는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파티 속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도 계급 상승의 꿈을 버리지 못한다. 뒤이어 수행되는 기우의 행동 역시 그가 버리지 못하는 꿈(상상)과 떨어지지 않은 채로 제시된다. 기우는 박사장의 딸을 껴안고, 자신의 생존과 자신의 꿈에 방해가 되는 문광네 부부를 처리하러 산수경석을 들고 지하실로 향한다.
머리통을 돌로 두 번 씩이나 맞더라도 기우는 살아나고야 만다. 생존 뒤에도 기우의 꿈은 지속된다. 생존했기에 생존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것인지, 생존의 꿈이 좀비처럼 그를 되살리는 것인지. 상승의 꿈을 놓지 않는 기우가 자본주의 세계의 생존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 헛된 꿈만이 자본주의를 지탱케 할 것이고, 이 세계가 허용하는 꿈이란 자기 세계의 작동 원리를 위협하지 않는 그런 헛된 꿈들 뿐이다. 다른 세계를 꿈꾸려던 기정을 죽게 냅둘 수밖에 없다. 기정이가 음식을 전달함으로써 같은 계급이 연대할지도 모르게 되는 그런 위험천만한 행동은 저지되어야만 한다. 자본주의 세계의 원리는 자기 세계의 충실한 대리자인 연교를 통해서 아무 악의도 없는 것처럼 둔갑된 채 그런 삑사리를 작동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가능성을 내재한 기정의 캐릭터는 이 세계에서 죽어 마땅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