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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ngyouth Jun 04. 2019

기생충 (2) 잃어버린 '애비'를 찾아서

<기생충>(2019)

영화 <기생충>의 마지막 장면은 '기우'의 내레이션과 함께 기우의 '헛된' 꿈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기우는 아버지 '기택'을 다시 찾아낼 것이라고 읊조린다. 명백히 살인을 저지른 기택이지만 아버지이기에 죄와 상관없이 그를 계속 껴안겠다는 이 내레이션은 꽤나 눈물겹기까지 하다. 이 얼마나 끈끈한 부자관계란 말인가! 비단 마지막 장면에서만이 아니라 아들 기우가 아비 기택을 대하는 태도에는 일관되게 존경이 어려있다. 마찬가지로 아비 기택이 기우를 대하는 태도 역시 기이한데, 특히 그것이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기택과 기우가 대화를 할 때의 어조에서다. 이들 부자의 대화는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적인 느낌을 안긴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란 것이 있구나." 이토록 기이한 어조로 이야기를 나누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마지막 장면에서 제시되는 기우의 꿈이 이뤄질 리 없는 '헛된' 것임이 밝혀지는 순간, 또 하나의 사실 역시 판타지로 드러나게 된다. 돈을 모아 집을 사겠다는 기우의 꿈이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될 때, 기택의 구출 역시 요원한 것이 되어버린다. 즉, 기우의 꿈이 헛되다는 것은 아비를 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 역시 헛되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비 기택은 끝끝내 그 지하실에 유폐될 것이다. 관계의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려 했던 '기정'이 죽음으로써 이 세계 안에서 삭제되었듯, 이 세계의 충실한 대리자인 박 사장을 죽여버린 기택 역시 단박에 세계를 위협하는 위험인물이 됨으로써 유폐된다. 사실상 감옥과 다를 바 없는 지하실에 갇힌 기택의 삶이란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적 삶을 허용받지 못하는 죄수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 세계의 질서를 위협한 기택과 돈을 모아 상승함으로써 이 세계에 충실해지겠다는 기우의 공생은 사실상 불가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간 기택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자본주의의 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택은 생존을 거듭 모색하곤 했지만, 결국 체념에 이른다. 이 안에서 기택의 생존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혁명'을 꿈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획할수록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을 깨달은 기택이 "무계획이 최고의 계획"이라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그는 자본주의 세계로부터 생존을 허용받았다. 이 세계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각성이 혁명이 아니라 체념이 됨으로써, 기택은 살아갈 수 있었다. 기택이 사회적 생존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그가 선을 넘어 박 사장을 찌르는 일종의 "혁명" 비슷한 것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택이 수행한 그것은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를 여전히 보지 못하는 맹목 탓인지 정치적 혁명이 되지 않고, 자본주의의 대리자에 불과한 박사장을 살인함으로써 폭력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그런 기택을 기우는 끝까지 끌어안으려 한다. 체념 아닌 얼마간 각성을 한 기택이나 다른 꿈을 꾸어 보려는 기정과 달리 기우는 계속해서 같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인지, 그리고 그 꿈이 결코 이뤄질 수 없는 환상이기에 끝까지 붙잡아둘 수 있는 무언가로 기능하기 때문인지, 잃어버린 기택을 찾아 함께 살겠다는 기우의 꿈은 계속 유지된다. 그러나 기우가 당장에라도 그 집을 찾아가 현실의 아비를 구출하는 선택지는 없다. 이로써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현실에서는 불가한 것이 되는 이 상황은 곧, 아버지 기택이 아들 기우의 상상 영역 속에서나 언제나 머무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같은 <기생충>의 기우와 기택의 부자 이야기는 바로 곧 프로이트의 '가족 로망스'에 대입된다.


비천하고 무능력한 아비 기택은 기우에게 부정되지 않는다. 완벽한 아버지란 존재하지 않기에 산전수전을 겪어 생존해있는 아버지는 비천할지언정 존경스러운 존재다. 이런 기우가 박가네 저택으로 신분을 위장한 채 '침투'하고, 그가 아비를 저택으로 불러들이는 순간에 의미심장한 장면이 만들어진다. 상상된 정체성을 새로 세운 기우가 기택을 위장시키기 위해 연기를 지도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상상된 아버지'가 현실 속에서 아들에 의해 실제로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이때부터 기우의 상상된 아버지가 실재하는 아비 기택을 대체한다. 산수경석을 껴안는 기우는 끝까지 상승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데, 당연히 이런 아들에게 소환되어야 할 아비는 자신의 꿈에 걸맞은 아비에 다름 아니다. 즉 기우가 잃어버리고 다시 찾아야 하는 아비란, 상승하려는 자신의 자본주의 욕망에 반하지 않는 상상된 아버지이지 살인을 저지른 다시 비천해진 현실의 아비가 결코 아닌 것이다. 이런 기우이기에 그 마지막 꿈에서나 아버지와 조우할 뿐이다. 지하실로 유폐된 현실 '애비' 기택을 기우는 결코 찾지 않을 것이고, 찾지 못할 것이다.


영화 <기생충>의 마지막 장면은 아들 기우가 잃어버린 아비 기택을 다시 찾겠다는 다짐으로 마무리된다. 여기서 아들 기우의 다짐을 나는 묘하게 영화 바깥 감독 봉준호의 워딩과 연결 짓고 싶어졌다. 기막힌 타이밍으로 봉준호는 한국영화100주년에 황금종려상을 거머쥐게 됐다. 한국영화100주년에 한국영화가 칸영화제서 (대통령의 축전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 것이다. 수상 후 기자회견 자리서 봉준호는 감독 김기영의 이름을 소환해냈다. 감독은 물론이고 기자와 평론가들은 김기영의 <하녀>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기생충>과 <하녀>를 비교하고 있다.


아주 감상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얼마간' 봉준호의 <기생충>과 김기영의 <하녀>가 이어질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를테면 계급의 아래에 자리한 자들이 상위의 '집'으로 침투한다든지, 계단 이미지의 차용이라든지, 능력 불구의 남편과 비교되는 아내의 모습이라든지 등에서 김기영을 떠올릴 만하다. 봉준호의 <기생충>은 그래서 '일면' 한국고전영화와 동시대 한국의 영화를 이어내는, 감독 김기영으로부터 계보를 만들어내는 결과물처럼 보인다. 이는 박제된 한국고전영화들, 드물게 소환되던 한국고전영화의 감독들, 그래서 어쩌면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한국고전영화들이라는 '아비'를 찾아 나서는 봉준호의 결과물로 읽히기도 한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나의 넘치는 자의식이 작용한 탓이다.


그러나 기우의 '애비' 찾기가 성공적으로 이뤄지지 않을 것 같듯이, 봉준호와 김기영의 조우 역시 <기생충>을 통해서는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김기영의 엑기스라 함은 그야말로 끊임없이 생동하는 "의지"일 텐데 <기생충>에는 삶에의 "의지"라는 것이 전무하다. 기우의 다시-살아남은 생동하는 "의지"가 일으킨 부활이라기보다 죽었기에 죽지 않게 되는 (자본주의) 좀비와 더 닮아 있다. 기우가 보이는 상승과 생존의 "의지"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불어넣은 것이지 결코 그의 내부에서 솟아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김기영의 의지는 <고려장>에서는 주인공을 둘러싼 운명과 관습을 뚫어 버릴 정도의 것이었고, <이어도>에서는 근대와 전근대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독존의 상태로 버티고 있었다. 즉, 김기영의 의지는 언제고 시스템을 찔러 박살낼만 한 성질의 것이다. 그 엑기스를 들추지 않은 채로 계단이나 계급이나 부부관계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표면만을 핥을 뿐인 꼴에 다름 아니다. 기택이 박 사장을 찌르는 그 순간에 무언가 튀어나올 법했지만, 종국에 보게 되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종신형을 받고 있는 기택의 모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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