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밤의 꿈 어쩌면 기억
본 내용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내용은 영화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입니다.
등장인물
옥주: 첫째 딸. 부모님이 이혼한 후, 아빠와 동생 동주와 함께 살고 있다. 어지럽고 불안한 10대를 보내던 중 할아버지 집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게 된다.
동주: 옥주의 남동생. 장난스럽고 애교가 많다. 옥주와 매일 다투지만 옥주에게 가장 많이 의지한다.
아빠: 사업의 실패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옥주와 동주를 책임지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고, 결국 할아버지에게 다시 도움을 구한다.
고모: 아빠의 여동생. 남편과 이혼을 결심한 후,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
story
여름방학 동안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게 된 옥주네 가족. 그리고 별거 중인 고모도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 텃밭에서 따온 과일을 먹고 할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는 날들이 이어지지만 가시지 않는 더위처럼 그들의 불안과 어려움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빠의 가난, 엄마의 부재, 고모의 방황, 사춘기 등. 이 가족의 짧고 굵은 여름밤은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보이지 않는 벽
옥주네 가족에게 크게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서로의 감정을 깊이 공유하지 않는다. 아빠와 고모는 서로를 배려하고 다정히 대하는 듯 보이지만,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는 이야기를 나눌 때 서로에게 서운한 감정이 꽤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가 요양원으로 가고 나면 당분간 이 집에 머물겠다는 이야기에 고모는 표정이 어두워지며 그동안 서운했던 감정을 은근히 드러내지만 더는 따지지도 않고 아빠도 고모에게 더 묻지 않는다. 이 둘의 대화에선 “별일 아니야.” “아냐 괜찮아.”라는 말들로 가득하다. 보이지 않는 벽들이 이 집을 채운다.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함께 보낸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랫동안 감정을 공유하지 않을수록 보이지 않는 벽은 더 두꺼워진다. 그 해 여름밤, 정원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그들의 진실한 이야기들이 묻혀버렸다.
그리움이 꿈으로 변하고
어느 날, 옥주는 고모에게 묻는다.
-할머니 보고 싶어?
고모는 매일 꿈에 할머니가 나온다는 대답과 함께 일화를 이야기한다. 고모가 갓난아기이던 시절, 할머니가 자신을 안고 횡단보도를 달리던 생생한 기억이 있는데 그게 알고 보니 어릴 적 기억이 아닌 꿈이었다는 이야기. 그리움이 꿈으로 변하고 꿈은 기억으로 착각되어버린 이야기.
엄마의 꿈을 꾸지 않던 옥주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엄마와 함께 밥을 먹는 꿈을 꾼다. 옥주는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공허한 표정을 짓는다. 자신이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무너지고 여전히 엄마는 나를 보고 가지 않았다는 현실이 옥주 앞에 마주하고 있다. 고작 알맹이 같은 감정인 줄 알았지만, 바위보다 더 크고 단단한 그리움과 외로움이었다. 이 바위가 깎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옥주 곁에 있던 바위는 사라졌으면 좋겠다.
울 수 있는 아이, 옥주
옥주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는 동생 동주다. 동주는 모든 걸 숨기지 않고 표현한다. 옥주는 그런 동주를 보며 자존심도 없냐며 성가시다는 듯 군다. 옥주가 동주의 모습을 성가시게 여기는 이유는 본인에게 그런 모습이 없거나 혹은 그런 모습을 내심 바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옥주는 모든 것을 참는다. 낯선 환경, 답답한 아빠, 연락하지 않는 남자 친구. 모든 것이 짜증 나고 싫증 나지만 더는 표출하지 않는다. 옥주는 본인의 구역이라 칭하는 2층에서 홀로 감정을 삼켜내고 고민한다. 누구보다도 외롭다.
옥주가 유일하게 감정을 터뜨리는 순간은 할아버지의 장례 이후다. 사랑하는 이들이 떠난 집으로 돌아와 버티고 버텼지만 물밀듯이 몰려오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2층으로 올라가 엉엉 울어버린다. 그동안 제대로 내뱉지 못한 울음들이 기다렸다는 듯 속절없이 나온다. 이렇게나 잘 울 수 있는 아이였다.
주인공을 꼭 안아주고 싶은 영화들이 있다. 혼자 견디느라 외로웠을 시간을 조금이라도 위로해주고 싶은 영화들. 어쩌면 영화가 아니라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만 같아서.
엄마
옥주의 부모님은 이혼했다. 그리고 옥주는 그 누구보다도 엄마를 보고 싶어 한다. 동주는 가끔 엄마를 보러 가는 것에 마냥 신나지만, 엄마와 대화하지 않는 것으로 엄마가 자꾸만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서운함을 알아주길 원한다.
옥주가 할아버지 집에 지내는 동안 가장 의지했던 인물은 고모다. 고모를 마지막으로 봤던 날을 유일하게 기억하고, 절대 출입 불가였던 자기 방의 모기장에 유일하게 출입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떠다니는 고민도 고모에게만은 털어놓는다. 그럴 수 있던 이유는 옥주에게 고모는 친구이자 엄마의 역할자이기 때문이다. 옥주에게는 함께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리웠다.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시간. 특별하지 않아도 소소한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주는 것. 이런 시간이 없었기에 옥주는 모든 걸 그냥 참아버렸을지 모른다. 엄마의 부재는 남은 가족들의 유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부재로 인한 옥주의 외로움과 불안도 보여준다. 엄마가 밉다고 말하지만, 매일 꿈에 엄마가 나온다는 고모를 부러워하는 옥주의 얇은 유리장 같은 마음과 함께.
시간이 머물러있는 집
<남매의 여름밤>을 본 많은 관객은 할아버지의 집에 대한 여운을 짙게 느끼는 중이다. 옛 시간으로 잠시 돌아갈 수 있게 만드는 집. 큰 창이 있는 2층 집인 이곳은 오래된 시간을 증명해준다. 요즘 찾기 어려운 전축, 낡은 선풍기, 쌓여있는 담금주, 달마도 그림 그리고 이 집에서 성장했던 아빠와 고모가 돌아오니 모든 것이 잠시 예전으로 돌아간다.
감독은 이 집을 발견하자마자 이 집만이 영화를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집은 실제로 할아버지 부부가 50여 년간 살고 있는 곳이었고, 소품이 아닌 실제 사용하던 물건들을 그대로 두고 촬영했다고 한다. 이 영화가 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사람의 온기가 담겨있던 공간에서 이야기가 펼쳐졌기 때문이 아닐까.
사라진 후에 남겨진 것들
동주와 옥주는 장례가 끝난 후 한참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현관문 앞에 앉아있다. 그리고 영화는 할아버지가 머물던 공간을 한 장면씩 보여준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늘 자리를 지켜준 이가 사라졌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고, 당연하지 않다. 방 한쪽에 그리운 부모님의 사진과 햇살 조각이 드리운 계단과 언제라도 고모와 빨래를 널 수 있을 것 같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빨랫줄 그리고 할아버지가 늘 열매를 따던 정원. 이 모든 공간에 여름밤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다신 돌아갈 수도 없는, 추억이 되어버린 것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할아버지의 부재는 그의 존재가 가족을 다시 모이게 만들었고 찰나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옥주만의 사랑 표현
옥주는 동주처럼 할아버지에게 애교를 부리거나 말동무가 되어주진 않는다. 하지만 가족들 중 가장 할아버지의 입장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인물은 옥주다. 당사자가 아닌 아빠와 고모의 결정에 의해 할아버지의 생활권에 대해 유일하게 반기를 드는 인물이 옥주다.
- 그걸 왜 우리가 결정해?
옥주가 할아버지의 입장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장면들은 그동안 표현하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사랑이 아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 그리고 옥주와 동주는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그들만의 사랑의 방식이 이미 형성되었다.
어느 날 새벽, 할아버지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홀로 무언가를 추억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짓고 있다. 옥주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지 않고 2층 계단에 앉아 묵묵히 할아버지의 시간을 함께한다. 옥주만의 사랑의 방식이다. 먼발치에서 사랑하는 이의 시간을 함께해주는 것, 그의 사유를 함께 느껴보는 것.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짧은 여름밤
영화의 계절적 배경은 여름이다. 여름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그래서 밤에만 찾아오는 선선한 바람도 짧게 끝나버린다. 찰나일수록 더 소중하고 반가워진다. 짧은 여름밤에 옥주네에게 불어온 찰나의 선선한 바람은 아이들이 자라고 나서도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여름이 되면 그날의 냄새가 생각나고 그날의 대화가 떠오를 것이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순간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랬기에 더 생각나는 뜨거웠던 여름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