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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rector JI May 27. 2024

#7 살아있는 전통

20240527

선생님을 만나면서 내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이 한 번씩 깨질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묘한 희열이 있다. 이를테면 종 선생님이 말씀 중에 "전통이 언제부터 전통이었냐?"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야기인데, 설명하자면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전통문화가 일제강점기에 빼앗겨서 흔적이 사라지거나 맥이 끊겨있다. 종도 예외는 아닌데 일제강점기 이후의 기술을 잇는 것을 전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종의 우수성은 신라시대에 만든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에서 시작되는데 그 기술과 소리를 재현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일제강점기 이후의 기술을 가지고 전통을 운운하던 때에 종 선생님은 일본에 있는 빼앗긴 한국의 종을 찾아 그 문양을 재현해 왔다. 그리고 소리는 최대한 에밀레종에 맞춰서 기술을 발전시켰다. 과거의 것을 그대로 이어 재현하는 것이 아닌 우수한 것을 찾아 그것을 더 발전시키는데 기준을 둔 것이다. 그러면서 "잘 된 것을 받아서 발전시켜야지 잘못된 것을 받아서 전통이라고 하면 안 된다"라는 말을 하실 때엔 전통에 대한 확고한 가치관이 느껴지기도 했다. 


방식 하나하나 재료 하나하나까지도 세심하게 검토하며 전통인지 아닌지 따지는 기관에 맞서 새로운 재료를 개발하고 종의 본질인 소리에 정답을 찾으려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형식에 얽매이는 사람들 보다 살아있는 전통을 만들고 있는 선생님 편에 서고 싶어 진다. 


방짜유기 이수자(3대)와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다. 방짜유기는 3대가 대가 잇고 있는데 아흔이 넘은 명예보유자 이봉주 선생님(이수자에게는 할아버지)은 매년 초에 식구들을 모아 새로운 영역의 방짜제품 10종을 개발하라는 명을 내린다고 한다. "시대에 맞춰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자세가 없었다면 방짜는 이미 이 세상에서 없어졌을 것"이라고 말씀을 덧붙이셨다는데 식기류부터 악기, 현대에는 오브제로서도 방짜가 자리 잡은 것을 보면 방짜의 대중화는 탁월한 제품과 기술보다는 소비자의 요구에 끊임없이 변화하려는 선생님의 자세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는 사람들, 기술로는 NO.1이 된 장인들은 그 자리와 기술에 안주하지 않고 더 예리한 기술을 체득하기 위해 스스로를 공방으로 가뒀다. 적어도 내가 본 장인들은 매일 그곳에서 본인이 아직 풀지 못한 숙제를 풀기 위해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응접실에 수많은 상패와 훈장들이 먼지에 쌓여 색이 바랜 것처럼 전통은 멈춰있는 과거의 것이 아닌 발전되고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장인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기술 중에 중요한 것(본질)만 살리고 나머지는 발전시키는 것. 거기에는 배움의 자세가 깃들어 있었다. 내가 아는 것을 쓴다고 생각하는 것과 배운다라고 생각하고 임하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최근에 드라마타이즈형식의 광고를 제작할 일이 생겼는데, 익숙지 않은 방식이어서 부담은 있었지만 남이 만들어놓은 정답을 베끼기 보다 내 안에서 납득될 만한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현장의 스텝들에게 그리고 내공이 있는 배우분에게 배운다고 생각하고 현장에서 하나씩 이야기를 나누며 조율해 갔다. 후반제작까지 끝나고 영상이 온에어 되니 무언가 하나 새로운 것을 습득한 기분이 들었다. 소비한 것이 아니라 채웠던 것이다. 장인을 보면서 느낀 것은 지금까지의 기술을 쓰면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을 배운다고 생각하면서 작품을 만드는 자세가 있었다는 것이다. 


종 선생님은 소리를 위해 매번 제작되는 종에 이런저런 실험을 하면서 소리를 연구하고 방짜 선생님은 유기가 어디에 올려질지를 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나전칠기 선생님은 옻칠과 자개를 붙이는 방식은 고수하되 디자인에는 상상의 날개를 달아준다. 매번의 작업들이 신나는 실험실이 되는 셈이다. 

결국 남이 아닌 어제의 나를 경쟁자로 두고 오늘 더 나아가는 것. 나의 오늘은 어제의 나보다 더 근사했는가? 반추해 보면 장인다운 삶을 사는 것이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에밀레종의 문양으로 제작된 종의 타종 촬영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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