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도 수준이 있다.
이전(이라 쓰고 머나먼 옛날)에 동방신기가 '주문 - Mirotic'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 가사 중에 '사랑은 뭐다 뭐다 이미 수식어 레드오션'이라고 하는 부분이 있다. 아마 시아준수 파트였지. 이처럼 이미 수많은 수식어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키워드에 대해 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딱 두 가지다.
내 주변에 한 친구는 좀처럼 고백을 못하는 사람이다. 항상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주변을 서성이고 어떻게 만날 기회가 생겨도 막 들이대지 못한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호의를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면, 뭔가 큰 댕댕이처럼 낑낑대다가 혼자서 정리를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왜 그러냐고. 왜 솔직하지 못하고 용기가 없냐고. 자존감이 낮은 것이겠거니 혼자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에는 답변이 뭔가 신선했다.
“내가 호감이 가는 사람이 생기면 말이야, 그 사람의 표정과 감정선 하나하나가 중요해져. 어느 정도로 중요해지냐면, 혹시 누군가 그 사람에게 호감을 표현한다고 해도 그 사람에겐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잖아? 나는 그것도 싫어. 그 누군가가 나일지라도 말이야.”
뭔가 매우 바보 같지만 이해가 돼버려서 더 답답한(?) 대답이었다. 물론 그 친구는 외모에 자신감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기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 거겠거니 했지만(나보다 못생기긴 했..), 그가 생각하는 '배려'라는 단계는 분명 한 차원 더 높은 것이었다.
그 친구는 본인이 상대방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이 상대방의 감정을 무시해도 좋을 만큼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 친구는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랑의 기준을 본인보다 상대방에게 맞추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과 사랑을 쟁취하는 방식은 당연히 다 다르다. 내 친구와 같은 방식이 옳다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사랑을 어떻게 시작을 했든, '사랑'이라고 부르는 관계를 시작했다면 저런 사고방식이 그 사랑의 품격을 한층 더 높여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이런 메타인지를 갖춘 사람은 연인 간에 싸움에서도 빛을 발한다. 본인의 감정에 휘둘리기 이전에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고, 쓸 때 없는 자존심을 잘 부리지 않는다. 실수를 인정하는 것에 빠르고, 본인의 감정을 우선적으로 쉽게 퍼붓는 방식의 표출을 최대한 자제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너인가, 너를 통해 행복을 느끼는 나인가. 말장난 같은 이 문장은 정말. 너. 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쓰고 그 대상을 명확하게 하지 않는다. 분명히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다.
그 사람이 나에게 기쁨이듯, 나도 그 사람에게 동일한 기쁨이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지. 아니면 그 사람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에는 사실 크게 관심도 없으면서, 내가 사랑이라고 말하면 그냥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느새 나온 지 10년이 넘어버린, 아 세월이여..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와, 1992년 출간 이후 쭉 사랑이라는 주제와 함께하는 게리 채프먼 할아버지의 '5가지 사랑의 언어'. 이 두 서적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오해하지 않는 법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럼에도 아직 건드려지지 않은 중요한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단연 ‘사랑의 배경’이다. 여기서 사랑의 배경이란, 5가지 사랑의 언어 중 왜 특정 언어가 본인의 언어가 되었는지 이해하게 해주는 중요한 키임과 동시에, '여자는 보통 이렇다, 남자는 보통 이렇다'와 같은 것들로 이해하기 힘든 것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강력한 단서다. 쉽게 말하면, 각자가 살아온 삶의 배경을 나누는 것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서로가 서로의 사랑의 배경을 모르면 높은 확률로 다음과 같은 벽에 부딪힐 가능성이 있다.
'왜 이렇게 별 것 아닌 것에 집착하지?'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나?'
'왜 굳이 저런 방식을 고집하면서 살까?'
‘아 왜 저래.’
그렇기 때문에 무릇 사랑을 시작했다고 하면(혹은 시작하려 한다면), 서로가 어떠한 가정과 환경에서 자랐는지를 솔직하게 나누고,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어떠한 부분이 지금의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그 사실을 객관화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인품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말해주지 않으면 언제까지 ‘저렇게 행동하게 된 것엔 무슨 사정이 있겠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문제다. 이해가 아닌 맹신으로 이루어진 사랑이라면 언제든 차가워져도 이상하지 않다. 결국엔 ‘난 널 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겠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신의 사랑을 깨우치지 않는 이상은, 브루노 마스의 ‘Just the way you are’ 식의 사랑은 유통기한이 짧다.
사랑의 배경을 소개하는 사람은, 본인 스스로 자신의 사랑의 배경을 얼마나 객관화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그저 그 이야기가 과거에 있었던 일들과 과거 사실들의 나열일 뿐이라면 딱히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있다고 여기기 힘들다. 그 말인 즉, ‘어제 지나가다 본 길냥이가 너무 이뻤다’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어떠한 환경 때문에 나의 어떤 모습이 좀 과한 지, 혹은 모자란 지를 설명하고 그에 대한 이해를 구해야 한다. 사랑은 100% 감정으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분명,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사랑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의지’이고, 이 의지는 그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그렇다. 아무런 이해도 돕지 않으면서, ‘나를 사랑한다면 의지를 보여봐.’라고 말하는 것만큼 수준 낮은 사랑도 없다.
사랑의 배경을 ‘잘’ 듣고 나눈 사람이라면, 따뜻하고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도련님, 공주님이라고 생각해서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현재를 단정하는 등의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상대방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이런 노력을 하고 있구나’와 같은 좋은 점을 발견한다면 관계는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반대로 자신의 배경에 의지하거나 자신의 환경을 탓하느라 현재 아무런 노력도, 변화도 꾀하지 않는 사람이 상대방이라는 것을 발견한다면, 서둘러 관계를 정리하고 시간을 아끼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딱 2가지 개념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만, 2가지 개념을 모두 가진 사람인지, 어느 하나가 부족한 사람인지, 아니면 아예 두 가지 개념과 거리가 먼 사람이지에 따라, 4가지 경우의 수가 생긴다. 필자는 감히 마음대로 다음과 같이 사랑을 대하는 사람의 레벨을 나눠본다.
1단계:
사랑의 대상은 본인 자신, 사랑의 배경도 모르는 사람. 이런 1단계의 사람이 자신의 연인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지는.. 읽는 분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단계:
사랑의 대상은 본인 자신, 사랑의 배경은 아는 사람. 사랑의 배경을 들었을지라도 사랑의 대상을 상대방으로 명확히 하지 못하면, '내가 이해를 해주고 싶은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라는 결과로 한계가 정해지기 쉽다.
심지어 본인은 나 정도면 상대를 이 정도로 잘 이해해 주는데, 그에 비해 부족해 보이는 상대에게 원인을 찾기도 쉬운 것 같다.
3단계:
사랑의 대상은 상대방, 사랑의 배경은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은 때때로 상대방의 설명하기 힘든 사고방식에 이해하기 힘든 답답한 문제를 마주할 가능성이 크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하고 싶은데 이해가 안 된달까. 스스로가 너무 힘들 가능성이 높다.
4단계:
사랑의 대상은 상대방, 사랑의 배경을 아는 사람. 4단계에 이른 사람은 상대방의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품을 수 있는 힘이 있다. 이해’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해’력’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랑의 4단계 중에 나는 어디에 위치하는 사람인지, 상대방은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함께 두 생각 모두 할 수 있는 사랑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각자가 생각해 보면 좋겠다. 한 사람은 4단계인데, 상대방은 1단계에 해당된다면 그 사랑은 어떻게 유지가 될까. 또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다른 조합이라면..? 읽는 분들의 상상에 맡겨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연애부터 결혼생활까지, 굳이 주고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서로 주고받는 일들이 많다. 이 짧은 글이 조금이나마 우리를 그런 상처로부터 지켜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사랑이라는 수식어 레드오션에 물 한 컵을 부어본다.
Meta Keyword:
사랑의 대상. 사랑의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