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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뒷북만 칠 텐가

사이토 미나코, 『문단 아이돌론』

by 박둥둥

몇 년 전 친구가 추천해줬던 책을 이제야 읽었다. 읽기 전에는 문단이 스타 작가를 ‘아이돌’처럼 만들어내는 과정을 분석한 책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그보다 훨씬 뼈아팠다. 사이토 미나코의 진단은 단순하다. 문단이라는 늙은 집단은 이미 대중의 욕망을 읽어내고 새로운 ‘아이돌’을 만들어낼 힘조차 잃어버렸다.

책은 주로 무라카미 하루키와 류, 그리고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스타 작가들의 등장을 다룬다. 다만 사이토의 글은 정통 문예지에 실릴 법한 꼼꼼한 비평이라기보다, 『BRUTUS』 같은 잡지에 실릴 법한 러프스케치 같다. 문학적 이론을 촘촘히 쌓아올리기보다는 대중적 감각으로 빠르게 던져낸 글이지만, 그 속에 담긴 통찰은 분명 날카롭다.


요시모토 바나나 현상의 본질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요시모토 바나나에 대한 분석이었다.
문단은 바나나의 등장을 당혹스러워했다. 문법조차 무시한 단순한 문장, ‘바나나’라는 기묘한 필명, 그리고 전 세계 20~30대 여성들의 폭발적 지지. 그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 문단은 필사적으로 ‘뒷북’을 쳤다. 어떤 이는 “이건 글이 아니다”라 했고, 또 어떤 이는 “일찍이 이런 작가는 없었다”고 극찬했다. 그러나 사이토의 진단은 냉정하다. 그 많은 비평 중 실제로 유효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평론은 작가와 대등하게 소통하며 더 나은 예술을 만들어내는 것이어야 하는데, 당시의 비평은 그저 ‘왜인지는 모르지만 이토록 팔리고 있으니, 문단의 평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자기 정당화에 불과했다.

사실 바나나의 글은 새롭지도 않았다. 이미 ‘코발트문고’라는 소녀소설 시리즈가 오랫동안 소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었고, 바나나의 문장은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문단은 이런 서브컬처를 외면해왔기에 그 연원을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녀가 전설적 평론가 요시모토 타카아키의 딸이었다는 사실은, 대중이 ‘바나나’로 읽은 것을 문단은 ‘요시모토’라는 혈통으로 읽게 만들었다. 그것이 바나나가 다른 코발트문고 작가들과 달리 중앙 문단에서 진지하게 논의된 이유였다.


하루키와 류, 그리고 문학의 ‘오타쿠화’

하루키와 류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다. 이들의 작품은 게임과 만화 같은 서브컬처의 문법을 바탕으로 쓰였고, 그렇기에 새로운 세대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단의 평론가들은 끝내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부는 구조주의, 정신분석, 탈식민주의 이론을 동원해 분석했지만, 사이토는 그것조차 “공략집을 보며 게임을 클리어하는 오타쿠의 마음”이라고 진단한다.

결국 문학 자체가 ‘오타쿠화’되었다는 것이다. 문단은 대중의 반응에 당황할 뿐, 더 이상 시대를 리드하거나 새로운 문학을 제시할 힘을 잃어버렸다.


느슨하지만 날카로운 스케치

물론 사이토의 글은 촘촘한 논리로 무장된 비평이라기보다는 인터넷의 ‘썰풀기’ 같은 거친 스케치다. 몇몇 부분은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문단뿐 아니라 한국 문단의 현재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진단이라는 점에서 읽어볼 만하다.

문단이 언제까지 뒷북만 치고 있을 수는 없다. 오웰의 말처럼 “글쓰기는 시대와의 전쟁”이라면, 평론 또한 마찬가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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