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상수첩 열일곱 번째 기록, ‘원흥’
벼르고 벼르다가 벼루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잊어버리게 되는 것들이 있다. 기록, 메모의 중요성이기도 하다. 근데 잊지 않기 위해 기록했어도 기록했다는 행위 그 자체를 잊어버리면 기억하고 싶던 그것은 영영 잊히게 된다. 가급적이면, 무엇이든 잊어버리기 전에, 무언가 하려 했다면 그 결심을 즉시 실천에 옮겨야 하는 이유다.
세상에 완전한 인간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결국 인간을 보조하는 지구상의 모든 기술, 장비들은 인간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여하튼 도구의 힘을 빌리든지 완전에 가까워지든지 간에 기억력이 점점 쇠퇴하는 걸 느끼는 요즘, 수많은 중식당 중에서도 특히 가봐야 할 곳들을 우선해서 다녀온다면 설령 가지 못한 곳들은 잊어버린다 하더라도 덜 중요한 기억부터 잊어버리게 될 테니, 이것은 내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랄까. 다행히도, 미처 잊어버리기 전에 완전에 가깝다고 알려진 맛을 살펴볼 수 있어서 한숨 돌렸다고 해야 할까.
소스 없이 나온 고기튀김은 맛의 적절한 조화로 꽤나 완전한 인상을 안겨줬다. 물론 그것은 고기튀김이었고 탕수육엔 응당 소스가 들어가야 하는 법이다. 아직 소스와 함께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완벽한 맛을 낸다는 건, 소스를 부었을 때 더 완벽한 맛을 낼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탕수육이 아니라 고기튀김이 유명했던 건가?
반골기질이 있어서 말이야, 남들 다 시키는 건 왠지 시키고 싶지 않은 그런 느낌이랄까, 다들 고기튀김 먹고 있으니 나는 탕수육이 먹고 싶었다 이 말이야. 근데 소스가 이렇게 소박하게 담겨 나오는 걸 보니 주인장 선생님은 고기튀김과 소스가 함께했을 때 완전하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이야. 소박하게 나오다 보니 채소들도 다소 박한 느낌이 있어서 괜스레 오이소박이가 먹고 싶었다 이 말이야.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소스를 붓고 있는 걸 보니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내 행동에 후회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언젠가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그 다짐을 다시 후회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타임머신이다. 과학자 선생님들, 엄한 거 만들지 말고 타임머신부터 만들어 주십쇼. 부탁하는 자세가 영 글러먹어서 아마 만들어 주시지 않을 거다.
돌이키고 싶다. 소스를 부은 날 원망한다. 왜 남들 다 하는 거 하기 싫다고 이 사달을 냈는가. 얌전히 잘 있는 소스는 왜 갖다 부어가지고 완전함을 무너뜨렸는가. 무너뜨린 것은 나인가. 아니면 완전함과 완전함이 만나 불완전하게 되어버린 탕수육인가. 문제의 주체는 나인가 탕수육인가, 고기튀김인가 소스인가.
완전한 음식을 먹고 그 완전함을 알아내지 못한 불완전함이 문제인 건지, 아니면 완전하지 못함을 깨달은 내 완전함을 탓해야 하는지. 어찌 됐건 취향에 맞지 않은 뭔가를 경험했을 때 불완전한 이 두 가지 것들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를 탓하지 않기로 한 내 다짐을 상기하며 무조건 후자를 택하리라. 결국 더 완전하지 못했던 건 내가 아니라 바로 그 맛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정말 불완전한 논리다. 탕수육이고 나발이고 논리야 놀자부터 다시 읽어야겠다.
그래서 짬뽕도 함께 먹었다. 누구 잘못인지 판단하기 전에 매운맛으로 스스로 큰코다치게 하려고. 근데 큰코다칠 만큼은 또 아니어서, 그냥 안 다치고 무사히 먹었다고 한다. 냠냠. 고기튀김에 반하고, 탕수육에 후회하고, 짬뽕에 감동하는, 내가 이렇게 기분파였던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갑자기 유명한 음악가인 줄로만 알았는데 더 알고 보니 친일파였다는 홍난파가 떠올랐다. 기분파 친일파 홍난파. 쇼미더머니도 꿈은 아닌 것 같다.
참새는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 하였지. 근데 왜 나는 짜장면을 지나가지 못했던가.
아니, 지나가지 못한 건 짜장면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워버렸다. 먹어서. 그리고는 또 후회하고. 뭐, 고통받는 건 내가 아니라 장이니까. 이러다 언제 한번 큰 사달 나겠지. 내장혈투 벌어지면 아픈 건 결국 나일 텐데 말이야. 그래도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니까, 있는 힘껏 넣고 빼고 반복하는 게 참된 도리 아닐까 싶다. 도리도리. 절레절레. 얼큰한 닭도리탕이 당긴다. 난 기억력도, 기록력도 안 좋으니까 배부른 건 금세 잊고 새로운 먹을거리 생각하는 건 정말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이치가 아닐까. 모든 자연은 완전한 것. 여기 있네. 완전한 것이 여기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