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상수첩 스물한 번째 기록, ‘진흥각’
알밤이 유명한 공주. 그래서 공주에 가면 가장 먼저 군밤을 찾곤 한다. 근데 요즘엔 공주에도 군밤을 파는 데가 많지 않다. 힘들게 찾아야 겨우 발견할 수 있을 정도랄까. 군밤뿐만 아니라 예전엔 길거리에 자주 보이던 군고구마, 찐옥수수도 언제부턴가 다 사라지고 없어졌지.
군밤 맛엔 추억이 깃들어 있다. 분명 그런 맛은 아닐 텐데, 이상하게도 군밤을 떠올리면 달곰하고 고소한 맛이 떠오른다. 아마 군밤을 처음 먹었을 때, 그 기억이 굉장히 달았나 보다. 군밤이 아니라 군밤처럼 생긴 맛밤을 먹었던 건가. 하여튼 이번 공주행에도 군밤을 빼놓을 순 없어서 겨우 찾아내 먹기는 했는데, 예전 같지 않은 맛에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변한 건지, 군밤이 변한 건지. 군밤보단 내가 더 많이 변했겠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군밤을 안 달게 만든 건 아닐까. 터무니없는 책임 떠넘기기. 그냥 내가 많이 변했나 보다.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게 나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근데 내가 변해버리면 뭐가 됐든 일단 변했다고 생각해버리니까. 가만, '변했다'를 두고 주체와 대상을 엄격히 구분할 수 있는 건가? 애초에 뭐가 먼저 변했는지 판단할 수는 있는 건지. 아니지. 변한 건 맞나. 원래라는 게 원래 있는 건가?
어찌 됐건, 이 집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내 바람이다. 탕수육은 나름 색다른 맛이 있어 좋고, 짬뽕은 중화요리 역사에 한 획을 그어도 되겠다 싶을 정도고. 오래 기다려 먹을 가치가 있는 맛은, 아무리 내가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았으면.
생긴 거만 보면 거의 분식집 오징어 튀김인데, 맛은 더 오징어 튀김이다. 나도 오징어니까 이렇게 심심찮게 동족상잔을 할 때도 있다. 아, 물론 돼지고기 맛이 오징어 고기 맛과 같은 순 없지. 맛이 비슷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튀김옷 때문이다. 아닐 수도 있다고 사족을 달아본다.
이것도 다 기분 탓 추억 탓이겠다만, 뭔가 불량한 맛이랄까? 학생이면 멀리해야 할 맛? 선도부 같은 맛? 은 아니고. 학창 시절에 어른들이 하지 말란 거 부득이 해냈을 때 느끼는 그 쾌감 같은 맛? 하지 말란 거 할 때가 가장 재밌다는 건 다 아는 사실. 고로 저 오징어 튀김 맛이 나는 돼지고기 튀김, 즉 탕수육은 분식집에서 중화요리를 먹는 기분으로 불량한 맛이 가득하다. 주지 스님도 울고 갈 맛. 재밌는 맛이란 얘기다.
무척이나 깔끔해서 한 그릇 다 비우고도 뭘 비웠는지 모를 정도로 깔끔하다. 말이 짬뽕이지 거의 결벽증 국물을 마시는 수준이다. 뭐라 불러야 하나. 결벽뽕, 짬결, 짬벽, 뽕벽증, 뭐 하나 어울리는 게 없네. 깔뽕? 깔끔한 짬뽕이니까 깔뽕이 괜찮은 거 같은데, 너무 뽕뽕거리는 거 같아 음식에 붙이기엔 미안한 이름이다.
기본적으로 짬뽕하면 얼큰하고 두터운 국물 아니겠는가. 근데 이 짬뽕은 오히려 부드럽고 투명하다. 실제로 제주 김녕 해수욕장처럼 그릇 바닥이 훤히 보인다. 매울 대로 매워진 요즘 짬뽕과는 사뭇 달라 아주 마음에 드는 맛이다. 유행을 좇아가지 않으면서도 설득력 있는 맛. 그게 바로 고향의 맛. 다시다가 아니어도 고향의 맛 충분히 낼 수 있다.
그동안 변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앞으로도 정말 변하지 않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