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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할무니 Apr 01. 2020

우리의 봄은 언제나 신성하다

탕상수첩 스물두 번째 기록, ‘신성각’

바야흐로 봄. 개나리, 진달래, 이거, 저거, 눈에 띄는 건 모조리 이쁜 계절이다. 하늘을 이불 삼아 어디라도 누우면 그곳이 바로 침대가 되는 그런 계절이기도 하고.


그런 계절이어야 하는데, V3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악성 바이러스 때문에 몸도, 마음도, 사회도, 경제도, 이거, 저거, 모두 피폐해진 봄 같지 않은 봄이 돼버렸다.


사람에겐 사람이 가장 고픈 법. 아쉬움이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아직 오지도 않은 여름으로 그 고픔이 이어질 것만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든다. 도쿄 올림픽도 연기된 마당에 우리 마음도 여유롭게 한 계절씩 뒤로 미뤄놔야 하는 부분인가.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배고픈 건 배고픈 거니. 끌 수 있는 급한 불은 일단 끄고 봐야지.


고차원적인 바이오 기술이 내게는 없어서, 당장은 내 수준에 맞는 일차원적인 해결법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신성하지 않은 것도 신성한 거로 만드는 사람들이 지천으로 널렸는데, 신성각에서 신성함 얻는 정도는 이해해줘야 하는 부분 아닌가.



이문길 선생님의 글귀에서 벌써 신성함이 느껴진다.


중화요리란 글자가 없으면 박수무당, 선녀보살과 조우할 것만 같은 분위기이다. 신성한 곳이니까 얼추 어울리는 모양새긴 하다. 어찌 됐건 일단 문 앞에서부터 벌써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게, 글귀만 보면 이문길 선생님도 21세기를 준비하면서 같은 영감을 받으신 것 같다.



춘장을 먹어보면 그 집 짜장면 맛을 알 수 있다고 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단무지, 양파 찍어먹기용 춘장.


한 그릇에서 소면 중면 대면을 한번에 느낄 수 있는, 이것이 바로 수타의 맛.


손으로 빚어 제각각의 굵기인 면들과 서겅서겅 썰어 또 제각각의 크기인 짜장 채소들이 모이니 전혀 제각각이지 않은 맛을 만들어낸다. 모양새와는 달리 대단히 차분한 맛. 두세 그릇 비워도 부대낌이 없다는 옆 테이블 선생님의 말씀이 스포일러가 되는 순간이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간짜장 옷을 입혀주면 이런 모양새다.


외투를 벗으면 상하의가 나오고, 상하의 다 벗으면 속옷이 나오고, 속옷마저 다 벗으면 알몸이 나오는 게 인간이라면, 이 간짜장은 알몸에 정장을 입혀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근데 알몸은 또 아널드 슈워제네거 최전성기급으로 잘 제련돼 있고, 외투는 내로라하는 명품처럼 화사하고. 알몸에 명품 외투 입혀놓으니 어떻게 보면 패셔니스타. 어떻게 보면 바바리맨인 것이다. 면을 잘 비벼서 간이 간간하게 배기를 기다리고 침착하게 먹어보자. 바바리 벗고 싶어도 못 벗게 만들어버리자. 피부와 하나가 되게 만들어 버리자. 현대인의 급한 습성 간짜장으로 침착하게 잡아내 보자.


이문길 선생님. 의도하신 게 이거 맞지요?



탕수육과 대파가 만나니 그 맛이 실로 훌륭하도다.


대파가 굉장히 큼지막하게 들어 있어서 대파를 좋아하는 나로선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고기를 먼저 먹을까 대파를 먼저 먹을까, 실로 행복한 고민이다.


일단 탕수육이니까 고기를 먼저 먹어본다. 무난하다. 신성각의 신성함은 대체로 재료의 신선함을 살리는 데서 오는 것 같다. 신선한 신성함. 어머니 쇼미더머니.

튀김옷이건 소스건 과하게 힘을 주지 않았다. 모난데 없이 무난한데. 사실 무난한 게 만드는 게 제일 험난한 법이다. "중간만 가자"라고 함부로 얘기하면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맛의 경중을 굳이 따지자면 단맛은 굉장히 드문 편이고 신맛이 더 드러나는 편인데, 신성각이라 그럴 수도 있고, 근데 그 맛도 그렇게 도드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튀김옷도 일부러 바삭하지 않게 튀긴 것만 같다. 착시 효과. 아니지, 착미 효과인가. 물론 튀김옷에도 크게 간이 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까 더 많이 먹을 수 있는 건가. 역시 무난한 게 최고인가.



탕수육을 집은 젓가락 모양새가 젓가락질의 고수임을 말해준다.


만두 만두만두 만두. 맛없게 생겼지만 그렇게까지 맛없지는 않은 만두 만두만두 만두.


신성각 메뉴는 짜장, 간짜장, 탕수육, 만두로 구성되어 있다. 이게 전부다. 짜장, 탕수육 먹었으니까 만두 안 먹으면 섭섭하지. 배신이야 배신. 근데 공갈만두였다. 내가 배신당했다. 공갈빵은 들어봤어도 공갈만두는 못 들어봤는데. 무난한 것도 적당히 무난해야지 너무 무난하면 또 안 되나 보다. 와, 진짜 어렵네. 무난하기도 힘든데 적당히 무난하기까지 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무난해야 되는 건지 원.


생각해 보니 그렇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적당 적당하니까, 그래서 봄을 그렇게들 좋아하나 보다. 이렇게 적당하기 참 쉽지 않은데. 자연의 힘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자고로 신성함이란 이래야지. 봄과 같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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