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맛 살리기 운동을 벌여야 하나
마음이 된통 애잔해질 때가 있다. 그 순간 단단해져야 한다고,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고 마음먹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때 먹는 마음은 맛이 없다. 살아남기 위해 먹고, 극복하기 위해 먹는 것이니, 간식과는 차원이 다른 먹음이다. 그러니 단단히 마음먹은 뒤에는 달달한 간식을 먹는 게 좋겠다.
일본에서 밥을 먹으며 그렇게 한편으론 즐거웠고 한편으론 애잔했다. 이 동네는 왜 이리 밥맛이 좋을까. 아무 식당에서나 메뉴의 입맛은 달라도 밥맛은 같았다. 한국은 식당들마다 밥맛이 제각각이다. 요리와 메뉴는 화려만발하고 쌀의 품종도 고급화돼 선택 폭이 늘어났는데 왜 밥맛 업그레이드는 안 되는걸까.
귀국 후 몇몇 사람들에게 ‘식당 밥맛이 진화하지 못하는 이유’를 물었다. 부분적으로 타당한 지적들을 저마다 달리 내놓았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식당에서는 구곡이나 수입산 쌀을 많이 사용한다. 비용을 아끼려 신선도와 수율이 떨어지는 쌀을 사용하니까 밥맛이 좋을 리 없다.
#2 과거에는 밥이 주식이었지만 지금은 보조 음식이 돼버렸다. 본메뉴에 공을 들이고 밥맛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밥보다 반찬, 밥보다 요리에 치중하면서 밥에 공을 덜 들인다. 다른 조리기구에는 과감히 투자하면서 밥솥과 쌀에는 인색해진 경향도 원인이다.
#3 갓 지은 밥은 대체로 맛있지만 오래 보관하면 어떤 밥맛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미리 해놓고 보관하는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해결 불가다.
그 밖의 이유들 중에도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밥그릇’ 때문이라는 제법 단호한 지적. 쇠그릇에 밥을 담는 방식이 밥맛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밥의 온기를 유지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쇠그릇(우리는 이를 공기라 부른다)을 전국 공용으로 쓰며 갓 지은 밥맛을 떨어뜨리고 있다. 세계의 쌀밥 문화권에서도 한국이 유일하게 쇠그릇 공기밥을 (일부가 아니라 대부분 식당들이) 전용하고 있다.
‘입맛’의 변화가 ‘밥맛’을 떨어뜨렸다는 지적. 굳이 글로벌 식문화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달거나 맵거나 자극적인 맛이 확산되며 퓨전요리에 익숙해져 간다. 이런 극적 식생활에서 밥맛의 심심함은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고 시장은 소비자 입맛에 호응하고 있다.
밥은 줄고 쌀은 남고, 밥맛은 떨어지고 입맛은 살아나는 시대이니 쌀의 적정생산량이나 적정 쌀값의 수준을 놓고 정답 없는 논쟁을 계속 벌이게 된다. 애잔한 시대풍경이다.
그러자 궁금증이 생겼다. 어쩐지 밥맛은 부정적으로 쓰이고 입맛은 긍정적으로 쓰이는 것 같아서다.
“밥맛없는 놈”이라고 말은 있어도 “입맛없는 놈”이라는 말은 안 한다. “입맛 땡긴다”는 말은 자연스럽지만 “밥맛 땡긴다”는 말은 영 어색하다. 어느새 ‘밥맛’은 ‘떨어지는 것’, ‘보기싫은 것’으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어휘에는 무의식이 담겨 있다.
이밥 저밥 먹으면서 밥맛 살리기 운동이라도 벌이고 싶은 때다. 밥맛이 살면 입맛도 살고 입맛이 살면 살맛도 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