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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어른에게 반말하면 안 될까?

by 하루살이


공동육아에서는 평어와 별칭을 사용한다. 우선 별칭을 지으라 하니 뭐 이런 귀찮은 일을 하나 싶었는데, 아이들이 나를 부를 때 땡땡이엄마라고 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평어란 말은 없고, 존댓말이나 반말이 아닌 평등한 언어, 수평적 언어 정도로 받아들이면 맞을 것 같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존댓말을 잘 사용하지 못하면 혼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한다고 한다. 실수할까 봐 자기 생각을 편안하게 전달하기 어려워하기도 하고 말 붙이기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이들의 좀 더 편안한 대화를 위해 아이들에 눈높이에 맞춘 수평적 언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공동육아 특성상 아이들이 다른 부모/어른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다 보니 평어도 별칭도 생겨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왠지 버릇없어질 것 같아 걱정이 들었지만 우선 적응해 보기로 했다.



처음 등원을 하니 아이들이 새로운 사람이 궁금했는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안녕? 나는 하루야! 너는 이름이 뭐야라고 물으니, 안녕 하루, 나는 성호야! 이렇게 답을 한다. 순간 어? 이건 뭐지? 왜 이렇게 편한 거지? 아이들이 반말을 사용하면 뭔가 거슬릴 것 같았는데, 왠지 진짜 그 아이와 친구가 된 느낌이었다. 그 후로도 아이들을 만날 땐, 내가 먼저 소개를 했다. 어떤 아이들은 친절하게 어떤 아이들은 시크하게 자기 이름을 말해주고 인사를 나눴다.



평어와 반말, 비슷한 듯하지만 다른 느낌이었다. 오히려 존대가 더 많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언어가 기본이었다. 공동육아에서 쓰는 건 반말이 아니었구나, 평어였네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물론 어른들 간의 소통은 존대를 기본으로 한다. 단지 누구 씨 누구 엄마, 누구 아빠 이렇게 부르지 않으니 나이에 따라 하대하거나, 한쪽만 존대를 사용하지 않고 상호 존대로 소통하였다.



아이들 이름은 어떻게 대충 외우겠는데, 어른들은 별칭이며, 누구 부모인지, 몇 번을 들어도 헷갈렸다. 등원 때 몇몇 엄마들을 만나긴 했지만, 이름도 누구의 부모였는지도 금세 잊어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관심이 없었다. 누가 누구 엄마인지 궁금하지 않았고, 그들과 얘기 나눌 일이 얼마나 있을까 하여 외울 생각도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가족 행사가 너~~~ 무 많아 이름을 애써 외우지 않아도 기억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계절이 바뀌니 엄마들이 옷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옷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우리 아이 연령이 제일 낮다 보니, 큰 상자로 두 상자를 받았다. 참고로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보통 날씨가 아주 심각하지 않으면 매일 나들이를 나간다. 산에서 모래장에서 놀이터에서 하루 종일 뒹굴다 보니 예쁘고 좋은 옷들은 크게 필요가 없다. 매일매일 자주자주 갈아입을 깨끗한 옷이면 충분하다. 여하튼 나에게 떨어진 옷상자를 얼빠지게 쳐다보고 있으니 한 엄마가 나한테 다가와 말한다. 하루! 이제 여기선 옷 살일 없어요. 약간 헌 옷도 있고, 새것 같은 옷도 있었다. 우리 아이는 주변에 형이 없어, 물려 입을 일이 없었는데, 생각지 않게 옷장이 한가득 채워졌다. 어쨌든 고맙다고 얘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름이 다 제 각각인데, 뭐라 했더라… 기억이 가물가물… 용케 한 명 이름이 생각나서, “별똥별님 고마워요” 톡을 보냈다. 금방 답이 왔다. “그냥 별똥별이라고 부르세요.” 왠지 어색하고, 이상하다. 별똥별이 내 마음을 알았는지, 처음엔 좀 어색한데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덧붙인다. 별똥별의 얼굴도 기억이 안 나는데, 왠지 고맙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생각해 보니, 부모들 이름을 알아서 누구 씨 하고 부르는 것도 어색하고, 우리 사회 관습상, 나이순으로 누구 언니 누구 오빠?라고 부르는 건 이건 더 이상하다. 아예 별칭으로 불러버리니 굳이 호구 조사해서 언니 동생 따질 필요도 이유도 없어진다. 그냥 어린이집 부모일 뿐이다. 누구 엄마 누구 아빠보다 훨씬 입에 잘 붙는 게 느낌이 훨씬 좋다. 그리고 아이들과 평어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상대에 대한 존중이 존대에서 나오지 않음을 금방 깨닫게 된다. 오히려 화자의 태도와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자세에서 그 마음을 더 쉽게 느낄 수 있다. 역시 말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더니 존대와 반말이 아닌 그 마음에서 존중을 더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시간은 흘러 흘러 아이는 초등학교에 가게 되었다. 늘 반말(평어)만 쓰다 존댓말을 쓰려니 예상했던 대로 제법 긴장을 했던 모양이다. 그동안 학교 가면 이렇게 해야 돼 저렇게 해야 돼 학교에선 이런 건 봐주지 않아 이런저런 형태로 아이에게 훈계라는 옷을 입고 겁을 줬던 것이 아이에게도 꽤나 부담되었던 모양이다. 4월이 되어 상담을 갔더니 아이가 초반에 말을 거의 하지 않아서 선생님은 아이 구강상태에 문제가 있는 줄로 잠깐 오해를 하기도 하셨다. 아이가 워낙 부끄럼을 많이 타는 샤이보이인 데다 존댓말이 편치 않으니, 침묵은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실수하지 않는 현명한 방법 중 하나였던 것이다. 물론 아이는 금방 적응해서 존댓말로 교사와 잘 소통하고 있다. 여전히 가끔 반말이 툭툭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조금 더 기다려 주기로 했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내가 아이에게 딱히 해 줄 것도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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