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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임 Apr 11. 2024

우연의 징검다리를 건너 필연의 직장으로

    가정에 충실하자 마음 먹고 집중한 시간은 엄마로서, 아내로서 최선을 다해 앞만 보고 달린 시간이었다. 뒤도 없고 옆도 없고 오로지 직진만! 달리다 한 번씩 멈춰 설 때면 이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내 모습은 어떨까 그려보았다. 이 레이스가 끝나는 지점은 존재할 것이다. 아니 끝나지 않더라도 걷는 것으로 충분한 시점이 올 것이다. 포기해왔던 옆도 보이고 지나온 뒤도 보일텐데 그때는 무엇을 향해 달려야할까.

  단 몇 시간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고 싶다고 간절히 외치던 소망이 둘째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졌다. 첫째가 초등학교로, 둘째는 유치원으로, 이른 아침 집을 나서면 오후 1시까지 나 혼자 누리는 자유가 주어졌다. 독박육아를 오롯이 감당하던 나에게 잠깐이라도 숨쉴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혼자있는 시간이 주어지니 어디를 향해 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여러 가지로 뻗어나갔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좋아하나, 무엇을 하고 싶나, 잘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사춘기 때 끝났어야 하는 질문이 나이 마흔을 앞두고 다시 시작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신기하게도 사춘기 때처럼 질문에 뭐 하나 시원하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은 쉽게 끝날 것 같지도 않았다. 답은 찾지 못 했지만 막연하게 '취업을 하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생겼다. 독일에 살며 이런 생각은 처음이었다.

  날씨가 환상적으로 좋던 휴일에 지인 가정과 넥카 강변에 나들이를 갔다. 어른들은 돗자리에 앉아 김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웠고, 아이들은 놀이터를 휩쓸고 다니며 신나게 놀았다. 한참을 신나게 놀던 딸이 갑자기 달려오더니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어떤 중국여자얘가 자꾸 나를 따라다녀.”

  딸 아이가 같이 가보자고 해 따라가보니 딸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예쁜 여자아이가 수줍게 웃으며 쳐다보았다. 우리가 빤히 쳐다보자 여자아이가 입을 열었다. "저 한국 사람이에요."

  그러고는 자기 부모에게 달려가 우리를 소개시키는 게 아닌가. 아이 엄마는 자기 딸이 한국 사람을 만나 너무 반가운데 쑥스러워 말을 못 걸었나보다고 했다. 얼떨결에 인사를 나누고 돗자리 합석까지 했다.

  얘기를 나누다보니 재미나게도 여자아이 아빠는 우리 남편과 마찬가지로 목사이자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는 유학생이었다. 그쪽 목사님은 독일어 외에도 신학공부를 위해 배워야 할 언어가 많아 힘들다며 우는 소리로 하소연했고, 이쪽 목사님은 이미 겪어봐서 잘 안 다며 위로해주었다. 서로 응원하고 위로하며 술술 대화를 이어갔다. 목사님 사모님은 나와 비슷한 또래인데 독일에 온지 2년이 채 안 됐으면서 직장을 다닌다고 했다. 가벼운 충격이 머리를 지나갔다.

  나는 독일에 산 지 5년이 넘었어도 독일어 때문에 취업은 언감생심 그림의 떡이었다. 독일에 온 지 2년밖에 안 되었다면서 직장을 다니는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조심스럽게 직장에 대해 물으니 마트 내에 있는 스시 매장에서 스시를 만들고, 독일어를 잘 하지 못 해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취업이 가능했단다. 독일어를 못 해도 된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스시는 낯선 음식이 아니니 나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서 그런 스시 매장을 본 적이 없었기에 어떤 일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막연하게 집 가까운 곳에 매장이 생긴다면 나도 지원해봐야지,라는 가벼운 다짐을 했다.  

  하루는 아는 분께서 서너 시간만 2살 아기를 봐줄 수 있냐고 물어보셨다. 부모가 오전, 오후 교대로 일을 하는데 중간에 근무시간이 겹쳐 아이 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아이 둘 키우면서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데 다시 어린 아기를 보자니 썩 내키지 않았지만 부부의 사정이 급해 보였다. 당분간은 가능할 것 같다고 답을 드리고 아기를 봐주기로 했다.

  처음 아기를 만난 날, 아기 아빠는 아기를 맡기고 오후일을 갔고, 아기 엄마가 퇴근하면서 데리러 온다고 했다. 약속된 시간보다 몇 시간이 지나 쓰러질 듯 지친 몸으로 아기 엄마가 도착했다. 너무 힘들어 보이는데 그냥 가라고 하기가 미안해 상을 차려 점심을 대접했다. 지친 아기 엄마는 마다하지 않고 한그릇 뚝딱 비우더니 그제야 살 것 같다는 얼굴이 되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리 힘드냐니까 마트에 있는 스시매장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설마 그때 그 돗자리 합석 사모님이 말했던??? 하이델베르크에 새 매장이 생겼고 거기에서 일하기 위해 이사를 왔다고 했다. 어머머! SES의 노래 '드림스 컴 트루(Dreams come True)'가 귓가에 울렸다.

  남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회사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입사정보를 찾아보았다. 여전히 하이델베르크에서 신입사원을 구하고 있었고, 매장이 있는 마트는 Kaufland라고 우리집 근처에 있는 마트와 이름이 같았다. 가까운 곳에 매장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반년이 지나 이렇게 기회가 찾아오다니. 그러나 두려운 것은 독일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린 남매의 등교. 아침 출근시간이 6시 30분이라고 했다. 아이들 아침식사와 도시락을 남편이 챙길 수 있을까? 장점이라면 퇴근이 오후 1시라 반나절은 아이들과 보낼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결정을 못 하자 아기 엄마가 다른 건 몰라도 독일어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했다. 자기는 독일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는데 일을 한다고 말이다. 남편은 아이들 등교를 자신이 책임질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의 남편 학생비자를 취업비자로 바꿀 때 우리 수입이 부족할 수 있는데 그때 나의 수입을 합산하면 비자받을 때 유리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될런지 모르지만 기회를 잡자고 했다.

  다급한 결정이 아니면 오랜 시간 묵혀두며 신중히 결정하는 성격이라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여졌지만 온 우주가 나를 밀어주는 기분에 저질렀다. '입사하고 싶습니다.’, 입사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신속하게 답이 왔고, 정식 입사지원서 제출 후 면접 날짜와 입사 전 하루 일해보는 프로베(Probe, 시범) 날짜까지 잡혔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독일이라는 낯선 땅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다는 두려움과 흥분이 나를 달뜨게 했다.

  드디어 면접날! 키 작고 시골 아저씨처럼 구수한 인상을 풍기는 베트남 아저씨가 면접관이라고 등장했다. 그의 수더분한 외모에 긴장이 풀렸다. 프로베를 하는데 직장동료들 모두가 동양인이라 마음이 편했다. 우리동네 Kaufland가 아닌 대중교통으로 45분이나 걸리는 Kaufland라는 게 반전이었지만 아기 엄마가 나의 동료가 되었다는 것 또한 재미난 반전이었다. 신기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고백을 한다. 사람에게는 우연이지만 하나님에게는 필연이다. 일을 하고 안 하고는 나의 결정이었지만, 필요를 알고 우연의 이름으로 내 앞에 하나 하나 놓였던 징검돌은 지나고 보니 필연이었다. 5년째 이 일을 할 정도로 적성에 맞고, 남편은 약속대로 아이들 등교를 잘 챙기고, 아기 엄마와 돗자리 사모님 얘기대로 독일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 내 월급이 수입으로 인정되어 남편 비자를 전환할 때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이것이 필연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오늘의 우연은 또 나를 어떤 필연으로 인도할까. 불확실함 투성인 타국생활이지만 주어진 징검돌을 하나 하나 최선을 다해 건너다보면 필연이었음을 고백하는 날이 또 다시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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