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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멸치맛초코 Jun 03. 2020

세상은 그의 눈으로 보기엔 너무 혼탁하기에

<행복한 라짜로 (Lazzaro Felice)> (2018)


 이 영화의 포스터만 보면 <아멜리아>처럼 엉뚱하고 유쾌한 영화일 것만 같고, 혹은 디즈니 가족 영화처럼 행복함 그 자체를 주창할 것만 같다. 그러나 정작 이 영화는 제목과 포스터와는 너무나도 상반된 이야기를 펼친다.     

 마을 지주인 후작 부인은 마을 사람들의 우매함을 이용하여 이들의 삶 전체를 착취한다. 세상은 변했고 노동법이 생겼지만, 세상과 단절되고 그대로 멈춰버린 마을에선 여전히 후작 부인 그 자체가 법일 뿐이다. 후작 부인은 오랜 시간 마을 전체를 착취했는데, 이 거듭되는 가난과 착취는 당연하게도 다음 세대에게, 그 다음 세대에게 대물림된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이 착취가 단순히 지주가 소작농에게 행사하는 착취로 끝나지 않고, 소작농 사이에서도 착취의 행태가 이어진다는 점이다. 특히 어떠한 일도 의문과 불만을 품지 않는 라짜로에게 온 마을의 사람들은 착취를 일삼는다.      



 이 영화의 독특한 지점 중 하나는 영화 내내 아무도 착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분노를 폭발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을 사람들은 부당함이 만연한 현실에서 순응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 그중에서 유독 차별받으면서도 다른 이들보다 훨씬 과도한 노동을 하는 라짜로는 단지 기계처럼 묵묵히 일할 뿐이다.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은 후작 부인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불만을 제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 또한 가난에서 비롯된 한탄에 가까울 뿐이며, 결국 나이를 먹은 탄크레디의 집으로 찾아갈 때, 성의를 보인다는 이유로 비싼 음식을 사가며 나쁜 감정이 없이 호의를 드러낸다.     


 물론 사회에 영리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한 채 겉도는 마을 사람들이 과연 착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들은 지주에서 소작농으로 이어지는 뿌리 깊은 착취를 끊어내기는커녕 새로운 수직적 착취 구조를 만들어냈다. 나이라는 권위와 사람들의 합의 및 방관을 바탕으로 라짜로라는 약자에게 끊임없이 착취를 반복하며, 하다못해 세월이 지나 다시 등장한 라짜로에게 착취의 고리를 여전히 채운다. 거기에 빈집을 털며 도둑질을 일삼고, 제품을 속여 파는 행위도 반복한다.      


 이토록 라짜로를 둘러싼 세상은 어떤 것 하나조차도 제대로 된 것도, 아름다운 것도 없다. 주변 사람들은 착취와 괄시로 그를 업신여긴다. 다른 이들은 냉정과 무관심으로 반응하고 있으며, 사회에 제도는 어떠한 것도 지키지 못한 채 올바르게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라짜로는 순수하고도 편견 없는 태도로 일관되게 모든 것들을 대한다. 추호의 의심도 없이 모든 이들의 말에 경청하고 신뢰한다. 타인의 착취도 라짜로에게는 자애(慈愛)이며, 불순한 행위도 그에게는 타인의 그 의도 자체가 공동선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 아름다운 선 자체의 존재는 어떤 잘못도 없다. 다만 그가 사는 이 세계가 너무나도 혼탁할 뿐. 이 본연의 선을 사람들은 아끼기는커녕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이용했으며, 정직한 선도 불순한 의도로 해석하기 바빴다. 두 번의 삶 동안 라짜로는 한결같이 행동했다. 그러나 세상 또한 역시 일관되게 혼탁했기에 그 두 번의 본연지성을 모두 뭉개버리고 말았다.      


 

 결국 <행복한 라짜로>는 이 더러운 세상에 더는 선이 머물 자리는 없다는 것을 목가적이고 동화적이면서 신화적으로 그린다. 라짜로는 행복했지만 다른 모든 이들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정말로 라짜로는 이 세계에서 행복했을까. 마지막 순간에 그는 행복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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