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0
프라하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던 것들
보지는 않았지만 널리 들어 알고 있는 드라마로 인한 기시감
언젠가는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깊이 와닿지 않는 색채
어쩐지 서울의 봄과 유사할 것만 같은 프라하의 봄
해변의 카프카를 있게 한 카프카를 낳은 나라
제목은 누구나 알지만 (거의)누구도 읽지 않은 - 나는 읽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저자 밀란 쿤데라가 교수로 있는 나라
누군가의 프사였던 두 개의 심장 네드베드도 체코 사람이었던가
물론 수 년간의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수행과
매일 밤낮으로 고독을 오독하며 오도독 씹어 뱉었던 스스로와의 싸움과
누구도 시키지 않았기에 사서한 고생.
무엇보다 전인류적인 재앙인 코로나로 인해 국경 없는 섬에 고립된
(정황상) 청년이 택한 첫 해외 계류지로 프라하를 택한 데에는
전 여친 - 이자 현 부인 - 의 여행지였기 때문일 것이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추억을 공유했으면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허나 우리를 갈라 놓은 사회의 제약과 근로기준법을 적용 받지 않는 근로자의 거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나.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물론 지금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사치를 시간과 돈을 들여서라도, 코로나의 위험과 마주해서라도 누려야 한다는 강박이 컸지만,
같은 장소에서 같은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값진 의미가 되지 않을까.
라고 하는
이유를 위한 이유에 의한 이유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갖다 대 보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떠나기 전의 망설임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회상할 아름다운 추억들의 시작점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말씀 드리는 순간 기내식 반주 삼아 맥주에 보드카, 더 준다길래 냉큼 받은 와인까지 신나게 마시다 시트에 쏟았다.
도착할 때 쯤이면 다 말라서 이 어글리 코리안은 잊혀지겠지.
마치 지난 수 년 간의 막막함이 그러했던 것처럼.
뭐라 할까.
매해 가을. 단풍과 낭만이 아닌 단지 빈 벽과 수험생 밖에 볼 수 없었던 수 년 간의 삶에선 닿을 수 없던 세계를 보고 싶었고, 느끼고 싶었고, 이렇게 키보드를 마주하니 확실히 쓰고 싶었던 것 같다.
가볍지만 가볍지 않고, 무겁지만 무겁지 않을 - 마치 누군가의 인생 모티브와 같은 - 프라하 여행기를 시작해 봅니다.
인천에서 두바이로 가는 비행기에서
누군가를 기리며
누군가를 그리며
+ a
불현듯 하루키가 소설 쓰러 맥북 - 90년대 당시 호화 사치품이자 기호품이었던 - 하나 들고 일본을 떠난 기분을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다.
내 삶이 묻어나고 내 생활이 묻어 있는 곳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 조금이라도 다른 환경에서 어떻게든 스스로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려했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추가 와인을 요청하며 끄적여 봅니다.
개포동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막연한 불안함과 기대감이
이코노미 좌석의 부대낌을 이겨내고 있으니
+ b
비행이 길다 보니 불현듯 과거의 여행들이 스쳐지나간다.
지구 반대편은 처음인지라 막연한 긴장감에 다시 없을 패키지 여행을 택했던 스물 세살의 서유럽행 그리고 보헤미안 소매치기
99%의 확률로 사기라는 여행책자 안내를 못보고 현지인의 꼬임에 넘어가 2만원짜리 숙소에 묵으며 5만원짜리 보트를 탔던
Bangkok city I can’t stop.
꽃보다 청춘만 보고 무작정 떠났으나 셋 중 누구도 꽃이 아니었던 - 청춘이긴 했을까 - 라오스여 아디오스
맥주 마시다 지갑 털렸으나 돈만 가져가고 지갑은 돌려준 고마운 비엣남 젠더 형님들
프라하에서 머무는 시간들은 또 어떤 추억들로 점철될까
라는 기대보다
줄어들지 않는 남은 비행시간과
줄어들지 않는 요의가 날 슬프게 하지만
그나마 비행기에서는 방구를 껴도 대류현상에 의해 용인된다는 짧은 지식 덕에 한 땀 한 땀 여행기 적으며 식은 땀을 더 식혀 봅니다.
앞으로 긴 비행에서는 창가에 앉지 말아야겄다.
주는 술을 마다할 순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