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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훈 Nov 29. 2021

프라하의 연인의 연인

Day 10

1.마지막 아침


눈 뜨자마자 짐을 싸고 화천, 제주도를 제외하고 살면서 가장 오래 머문 도시인 프라하를 떠날 준비를 하였다. 널부러진 옷가지가 한가득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육신이 짐이다. 겨울이라 큰 캐리어를 챙겨오긴 했지만 짐을 더 슬림화할 수도 있었을텐데. 마치 해마다 현장역량 강화라는 명목 하에 불필요 인력을 정리하는 모 회사의 본사 슬림화 정책처럼.


2. 마지막 맥주

선물을 절대 사오지 말라는 가족들의 신신당부 - 딱히 무얼 사야겠다는 생각도 없었지만 -  있었지만  손으로 가기엔 역시 허전하다. 그래서 프라하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체코에서 유명하다는 산양유로 만든 화장품을 챙기기로 했다. 시내를 굽이굽이 돌아 찾은 지아자 화장품에서 핸드크림을 여러  챙겨 길을 나섰다.


지난 열흘 간, 수 없이 지나쳤던 천문 시계탑과 구시가지 광장. 처음 봤을 때 경외감은 어느덧 매일 보던 양재천처럼 정겨운 풍경이 되었다. 굽이굽이 골목을 지나쳐, 두 번이나 방문했던 까를교탑 앞의 까를 레스토랑을 찾았다. 마지막 맥주를 위하여.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식사. 메뉴는 단연 꼴레뇨다. 즐겨이 찾았던 Pork’s만큼의 겉바속촉은 아니지만 언제 어디서나 맛있던 1리터 생맥주와 함께 시내 풍경을 바라보며 최후의 만찬을 즐겼다. 그리고 열흘  마셔댄 수많은 맥주의 풍미를 돌이켜보며, 지구 반대편의 이들에게 조만간 만나자는 안부를 전한다.


엄청나게 걷고 마시고 기도했던 - 마치 영화제목 같다 - 프라하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허나 마지막 남은 관문이 있으니, 두바이에서 3시간 경유하는 동안 두바이 김서방을 접선해야한다는 것. 그의 말로는 3시간이면 만나서 커피까지 마시고 다시 들어와도 충분하다는데 잽싸게 움직여봐야겠다. 아듀 프라하.


2-1. 에필로그  by 아이유

영어의 접두사 Pro 전에, 이전에라는 뜻이다. Epi 후에, 뒤늦게라는 반대급부의 뜻일테지.

신화에 관심이 있으면 알겠지만 Pro와 Epi는 그리스 로마신화의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에서 따온 접두어다. 미리 아는 자와 늦게 아는 자.


프로메테우스는 올림푸스 신들에 의해 타이탄의 시대가 종결될 것을 “미리 안” 신이며,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신들이 인간에게 금한 불을 전도한 신.

에피메테우스는 그보다 지명도는 떨어지나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으로서 “늦게 안” 신이다.


무엇을 늦게 알았느냐. 자신의 부인으로 맞이한 인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인간들에게 미칠 영향을 늦게 알았다 - 물론 당시 그리스, 로마에서 낮은 수준의 여성 비하 문화가 깔려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


여기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판도라 - 박스 오브 판도라의 그 판도라다 - . 모든 신들의 축복을 받은 인간인 바, 신들의 선물을 함뿍 담은 상자를 갖게 된다. 그리고 모든 신화에서 - 그리고 우리 삶에서 - 그렇듯 금기는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 판도라는 상자를 열었고 재난, 시기, 질투, 의심등 온갖 못 쓸 것들이 세상에 쏟아져 나오자 급하게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인간은 판도라의 상자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헛된 희망에 의지해 살아간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아이유 5집의 Epilogue 얘기를 하려다가 이렇게 잡설이 길었다. 물론 주로 그렇다.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를 건너고 있을 어느 상공에서는 미약한 와이파이로는 인간 세상에 접속하기 힘들기에 그저 다운로드한 컨텐츠 밖에 접할 수 없는 바, 올 해 5,6월 즐겨 듣기 위해 다운했던 아이유 5집이 눈에 들어왔다.


Prologue - logue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 가 하고픈 이야기를 하기 위한 소회라 하면 Epilogue는 하고픈 이야기를 다 하고 난 소회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불현듯 마주한 아이유의 Prologue는 매해 어려웠지만, 세월의 풍파 속에 길들여져 한층 더 어려워진 올 봄을을 떠올리게 했다.


좋아하던 음악을 들을 시간도 당연히 없었다. 열두 시 넘어 독서실에서 집으로 향하며 듣던 한 두 곡, 그게 하루의 위안이었다. 물론 집에 가면 언제나 고생했다고 토닥여주는 베아트리체가 있으니 힘든 내색은 보일 수도 없었지만. 그 당시 매일 마주하던 막막함에 비하면 타향에서 하루하루 마주했던 불안함과 앞으로 고향에서 마주할 하루하루의 막막함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리 생각해야지.


어디에도 없지만 어느 곳에나 있을 그 어느 날을 믿으며.


2-2 에필로그 by Justin Hurwitz(라라랜드 ost)

라라랜드가 개봉할 당시 백수가 된지 얼마가 안되서였는지, 이런 어마어마한 띵작의 존재를 추후  무한도전을 통해서야 알았다. 그러다 작년  베아트리체 덕에 한강변에 숨은 레이에서 1회독  음악을 주제로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가 있을  있다는 것에 깊은 감탄을 아니할  없었다.


이전까지 최애 영화는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1주일 간 3회독, 추후 2회독을 더 한 비긴 어게인이었다. 하도 봐서 조연의 조연이 입은 셔츠 마저 분간할 수 있었드랬다.


비긴 어게인은 시사하는 바가 없는 열린 결말로 인해 오롯이 영화를 즐길 수 있었던 것에 비하여, 라라랜드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꿈을 찾아 헤매는 남녀가 꿈을 찾아가는 과정과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얻는 것과 잃는 것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처럼 동화 같은 결말이 아닌 현실적인 결말이 주는 처연한 슬픔은 어찌나 아름답던가.


경계의 틈에 지나치게 오래 갖혀 있던 무소속의 틈바구니에서 하루하루 거친 숨을 내쉬던 김모씨에게 라라랜드는 여러 의미로 다가왔었다.

음악이 좋은 영화, 엠마스톤의 미모로 비롯된 미쟝센이 아름다운 영화, 그리고 인생의 회전목마 소겡서 무언가를 찾아 헤맬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그린 슬픈 영화.

그래서 작년 발표 전 날에도 오지 않는 잠을 청하기 위해 독한 술과 함께 라라랜드를 청하여 혼자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언제나 그랬듯 썰 - Prologue - 이 길었다.

이 영화의 압권은 마지막 10분의 반전에 있는데, 그 아찔한 플래시백에 1회독 할 때는 이게 무언가 싶었다. 그저 아름다운 결말을 꿈 꿨기에.


허나, 동화처럼 비현실적인 아름다운 결말보다는 미련이 남는 현실적인 결말이 주는 아름다움을 - 마치 우리 인생처럼 -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이 영화의 모든 기승전결은 7분 40초의 Epilogue가 털어 놓는다. 영화를 본 독자라면 충분히 공감하리라.


꿈을 이루어 별이 된 자와 별이 되지는 않았지만 꿈을 이룬 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기를 바란다.

지난 수 년 간 숨어 지낸 독서실의 어둠에서는 차마 마주할 수 없던 별을 마주한 누구처럼.


3. 두바이

여행의 수미쌍관을 위하여 출발할 때와 같은 옷을 입고 여행의  날에 만나기로 했던 두바이 김서방을 찾아 나선다. 오랜만의 해외여행으로 인해 환승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떠올리지 못했던  날과 달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능숙히 와이파이를 잡아서 연락을 취하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붐비는 출국장을 거쳐 심사대를 통과하자 - 사실 자동문 수준 - 그리운 김서방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2년 2개월만인가. 그 사이에 군대 갔어도 전역했을 시간.


짧은 조우 동안 두바이에서의 생활 얘기를 들었다. 나였으면 절대 못했을 타향살이를 현지 파병 경력을 바탕으로 잘하고 있는 거 보면 역시 대단한 친구라고 새삼 아니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줄기세포 조작 논란 이후 은퇴한 줄 알았던 황우석 교수가 두바이에서 후원을 받아 연구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하루 정도만 두바이에서 지낼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챙겨준 대추야자를 가지고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헤어지고 나서야 생각난 청첩장은 캐리어에 고이 모신 바, 미쳐 전달하지 못했다. 축의는 돈 조반니로 갈음하라고 했다.


4. 여행을 마치며


이제 인천공항까지 남은 시간은 세 시간 남짓. 긴 여정이었다. 물론 한 달 넘게 여행 다니던 프라하에서 만난 친구들에 비하면 짧지만, 언제쯤 이 정도 시간을 낼 수 있으려나. 물론 일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던 지난 날들을 생각하면 기꺼이 받아들일 근로자의 숙명이다.


언제나 그랬든 대책 없이 떠나는 여행에 대해 - 또한 시국이 시국인지라 - 스스로는 물론 가족들도 걱정이 많았다. 허나 늘 그랬듯, 직접 가보지 않았다면 미처 알지 못하고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너른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되어 충분히 행복한 여행이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보고싶은 배우자, 가족, 친구들, 먹고 싶던 된장찌개, 삼겹살, (건강을 생각하여) 소주를 마주하게 된다. 또한 한 달도 남지 않은 결혼식 준비와 구직활동등 열흘 간 일시정지한 나의 현실도.

돌아갈 곳이 있어 여행은 아름답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방랑이 아닌 방황일테니.


바쁜 시기에 흔쾌히 여행을 다녀오라고 해 준 베아트리체와 금전적으로 심정적으로 지원해 준 가족들, 바쁜 사무실 일정에도 불구하고 잘 다녀오라고 격려해주신 장인, 장모님께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써야했던 글이 아닌 쓰고 싶던 글을 쓸 수 있게 해 준 브런치와 누군지도 모르는 자가 쓴 어수룩한 글을 읽어준 독자분들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프라하의 연인의 연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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