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의 삼국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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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읽는 즐거움을 무엇에 비할 수 있으랴.
가장 기억에 남는 삼국지의 추천사 중 하나이다.
이 쯤에서 유비·관우·장비는 만나 형제가 되고, 이 쯤에서 크고 작은 영웅들은 위·촉·오만 남기고 사라지며, 이 쯤에서 그 많던 영웅들도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승자가 나타날 것을 다 알면서도 꺼내드는 삼국지의 맛은 여전히 알싸하다. 마치 조조가 매실 생각을 하게 하여 병사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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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을까. 아마 IMF로 온 국민이 어려워하던 초등학교 3-4학년 때였을 것 같다. 그 전에 책을 즐겨 읽었다는 것은 김시습이나 가능했을 것.
우연히 접하게된 만화로된 삼국지(전 60권)는 이제 막 세상 모든 것을 하나하나 배워가던 어린 나에게 재밌는 장난감이자 세계를 보는 창이 되었다. 도서관에서 빌리면 대출기간 동안 여러번 통독을 거듭했었고, 그 시절에도 전집이 있는 친구집이 - 그래도 단 한 번도 부모님께 사달라고 한 적이 없는 효자였드랬지- 그렇게 부러웠었다. 과연 나는 어떤 아빠가 될 것인가.
수없이 만화 삼국지로 단련된 나의 문화 컨텐츠는 PC게임의 태동기였던 세기말, 삼국지6·7으로 되새김질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제나 지금이나 게임에 달리 흥미도 없고 소질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삼국지 게임- 물론 장당 만 원도 안하는 불법 복제 CD를 통해서였으나 - 만은 열심히 했었던 기억이 난다.
촉한정통론에 입각한 나관중에게 가스라이팅이 많이 되어서여을까. 어느 시대를 선택하든 원픽은 유비. 빨간 자전거를 적토마라 애칭을 붙여주고, 역사에서 이루지 못한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길 반복하던 어린시절을 거쳐 활자의 맛을 조금이나마 알게된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도 두어번 함께 했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한 시간이 넘는 통학거리에 로욜라가 유일한 동반자였던 대학교 시절엔 더 자주 함께 했었고.
그렇게 지근거리에서 함께하던 삼국지가 매년 함께 하는 연례행사가 된 것은 군대에서 만난 대대장님 덕분이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삼국지에는 어느 정도 조예가 있었던 터라 어딜 가나 삼국지 얘기에는 빠지지 않았었기에 새로 오신 대대장님이 삼국지를 500번 읽으셨다는 인사는 - 물론 과장이 섞여 있었겠지만 -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와 같은 관심사를 가지신 직속상관이라니, 언제쯤 한 번 삼국지 이야기를 하실까 기대하던 차.
중대장이지만 중위여서 어지간한 회식에는 부르지도 않던 어느 주말. 풋살 후 식사자리에서 대대장님이 툭 던지신 삼국지 관련 멘트에 책과는 담 쌓고 살던 여타 중대장, 행보관들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였다. 짧은 군생활에 이게 웬 기회냐 싶어 슬몃 아는 척을 하니 신나신 대대장님 왈.
"본부(중대장), 삼국지 좀 읽었어?"
"네. 좋아해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앞으로 식사자리에 참석해."
그렇게 시작된 나의 군생활 마지막 반 년은 월수금 - 가끔은 토요일도 - 회식으로 점철되었지만
동문도 아니고 동향도 아닌데 단지 삼국지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뻐해주셨던 대대장님은 잘 지내시려나. 전역하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