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
1. 이른 기상
얼마나 잤을까.
방에 돌아와 병맥주 하나 들이키고 심연의 늪에 빠져들었다가 눈 뜨니 새벽 5시.
푹 자고 일어나니 길었던 어제 하루의 고난이 언제적 일이었나 싶다.
조식은 6시 반이고 해는 뜨지도 않아
모닝맥주를 들이키며 지구 반대편에게 안부를 전하여 본다.
듣던 대로 조식은 훌륭하나, 지정학적 특성상 육류 위주의 식단인지라 오래는 못 먹을 것 같다.
모름지기 고루고루 먹어야지, 편식은 편협함의 반증일 지어니.
2. 첫 근교 투어 - 카를로비 바리
일찍 일어나서 시간은 많고 계획은 없다.
오는 내내 비행기에서 탐독한 프라하 여행서를 뒤적거리며 느긋하게 일정을 세워보았다.
급할 것도 없고 급해야 할 것도 없기에.
눈에 들어온 것은 카를로비 바리.
체코의 대표적인 온천도시로 유명해서 은퇴하고 휴양오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프라하에서 플릭스라는 유럽의 시외버스를 타고 2시간에 걸쳐 카를로비로 향했다.
날이 우중충해서 사진의 색감이 이쁘진 않아 아쉽다.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에 키가 같은 알록달록한 옛날 건물들이 작대기 하나 세울 틈 없이 열맞춰 붙어 서 있는 걸 보면 정말 동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전설에 의하면 카를 4세가 이 도시에 왔을 때 다리 다친 사슴이 온천에 들어갔다가 회복한 것을 보고 만들어진 도시라는데 믿거나 말거나.
신기한 것은 여타 온천들이 목욕을 위한 온천인 것에 비해 이 도시의 온천은 소화 촉진 등 여러 효능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마시기도 한다는 것. 여기까지 와서 남들 다 해보는 것을 아니 할 수 없어 기념품 샵에서 도자기 컵을 사서 마셔 보았다. 듣던 대로 맑은 쇳물 맛. 철분이 많아서 그런 것이려나.
이 도시에는 12개의 원천이 있으며 곳곳에 콜로나다라고 하는 온천수 음용대가 설치되어 관광객들이 약수 먹듯이 마실 수 있다. 심지어 콜로나다 위에 건물을 지은 곳도 있으니 자연을 슬기롭게 활용할 줄 아는 동네렸다.
점심은 피맥.
사이즈가 따로 없어 그냥 시켰더니 한 판이 나오는 게 아닌가. 반 만 먹고 싸가려했는데 쉼 없이 마셔댄 온천수 덕일까. 코젤 후 필스너 테크를 타니 어느새 피자도 클리어. 풍기 버섯이 올라간 화덕 피자로 맥주와 어울리는 깔끔함이 괜찮았다.
-탄 부분은 몸에 안좋다고 화덕 피자의 탄 부분을 떼고 드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
온천수와 맥주 덕에 요의를 참지 못하고 화장실에 가기 위해 10크루나(500원 지출). 오늘도 떨어진 주식은 참을 수 있지만 화장실 10크루나는 참기 힘들다고 홀로 분을 삭히며 마주한 다이애나 타워.
거센 바람과 마주하며 카를로비 바리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청남대 전망대에서 마주한 매서운 바람과 너른 풍경이 스쳐 잠시 감상에 젖다가 남한산성 뒤안길 같은 산책로를 따라 걸어 내려왔다.
이 도시의 또다른 명물. 베헤로프카. 이 도시에는 12개의 샘이 있는데 베헤로프카를 13번째 샘이라고 한다나. 플젠의 맥주(필스너), 모하비아의 와인과 함께 체코 3대 술로서 식욕을 돋우고 소화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어 체코에서는 식전주로 애용된다고 한다.
녹색병이 낯이 익다 싶어 기억을 더듬어 보니 재작년에 프라하를 먼저 방문한 부인이 술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사다줬던 술이 아니던가. 같은 시간에 다른 공간에 있음에도 새로운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이번 프라하행이 내게 준 작은 선물인 것 같다.
추억에 새록새록 젖다가 면세 범위 내에서 큰 걸로 한 병 구비했다. 술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나눠줘야지.
2-1. 박정현의 도착
남한산성 뒤안길 같은 산길을 내려오다가 다른 의미의 여행 관련 노래인 박정현의 도착이란 곡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 에어팟을 귀에 꽂았다.
낮밤 눈동자 색, 첫 인사까지 모두 바뀐 곳에서 흔한 이방인의 고향 얘기는 결국 이별 - 그게 연인이든 익숙한 모든 것이든 - 에 관한 이야기다.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 것, 아무도 나를 위로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다는 가사는 나 같은 사회적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허나, 나라를 떠나서라도 당면한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Lena Park의 슬픈 읊조림에 어찌 아니 공감하겠는가.
저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비슷한 맥락이지만 다른 버전의 여행 노래가 떠올랐다. 하림의 출국.
기어코 떠나가는 사람아 편안히 가렴. 나르는 그 하늘에 미련 따윈 던져 버리고.
Lena의 노래가 떠나기 위해 떠나버린 화자의 노래라면 하림의 노래는 떠나기 위해 떠나버린 상대를 바라보는 화자의 노래다. 마치 냉정과 열정사이처럼. 소설의 결말이 어찌됐드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풀지 못한 난제 중 하나, 고부갈등이 시발점이 되었던 것 같은데.
아무쪼록 갈등은 잘 해결됐길 바란다.
3. 계속되는 프라하 야경 투어
고작 이틀이지만 지하철을 몇 번을 타고 오가다 보니 벌써 꽤나 익숙해진 느낌이다. 세 개 밖에 없는 노선은 - 그래서 환승역도 딱 세 개 -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서울의 수많은 노선에 비해 단촐하지만 도시가 크지 않은 덕에 충분히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물론 배차간격이나 남은 시간을 알려주는 서울의 기술력에는 따라갈 수 없지만.
대체 언제 검사하나 싶던 표 검사도 구경할 수 있었다. 종일 걸어 숙소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잠시 멍 때리던 찰나 마스크를 쓴 스크루지상의 할아버지가 다짜고짜 전화기를 들이대며 익명의 체코 여학생들에게 승차권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칸의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나는 정황상 티켓을 끊었으리라 생각했던 걸까.
다짜고짜 내놓으라 하고 순순히 응하는 광경을 보며 놀라던 찰나, 어느새 다음 역에 내리시더니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또 승차권 제시를 요구하시더라. 물론 검문 당하는 쪽도 순순히 응하였고. 어찌보면 따로 검표를 안하는 우리나라 기차 스타일인 건데, 한 번 걸리면 된통 뒤집어 씌우기 때문에 - 당한 적이 있드랬다 - 알아서들 잘 지키는 건가. 역시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게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
호텔에서 뜨거운 물에 잠시 피로를 녹인 후 카를교로 대표되는 프라하의 야경을 구경하기 위하여 다시금 호텔을 나섰다. 어제도 느꼈지만 정말 신기하고 아름다운 도시다. 우리나라로 보면 역사 유적지 2층 이상에는 현대인들이 그대로 살고 1층에서는 영업을 하는 것인데, 그 어우러짐이 정말 “걸을 맛” 나게 한다. 물론 시내 대부분의 관광지가 도심을 기점으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여서기도 하겠으나, 굳이 지도를 보지 않아도 “정황상” 맞는 방향만 견지하면, 책 속에서만 보았던 관광지들이 찾아올 때만을 기다린 것처럼 자리하고 있으니 이를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야경투어의 첫번째 코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 난 영동3교인 줄 알았는데 - 로 꼽히는 까를교. 30개의 석상이 다리의 남북으로 진열되어 방문객들의 시선을 집중 시킨다.
30개의 석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관광객들이 소원을 비는 얀 모 신부의 석상이다. 설화에 따르면 중세시대 프라하 지방의 왕이 왕비의 외도를 의심하여 왕비가 고해 성사한 신부 얀씨에게 털어놓으라고 하였으나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며 버텼다고 한다. 그러다가 하도 고문을 하자 한 생명체에게만 말하겠다며 지나가는 개에게 얘기를 - 동물 애호가였나 보다 - 했고, 이에 분노한 왕이 사형에 처하고 까를교 다리 밑으로 수장시켰다는 이야기. 아마 왕권과 교권의 치열한 경쟁의 희생양 아니었을까.
“걸을 맛” 나는 이 도시의 또 하나의 명물 레논벽.
얼핏 들으면 존 레논이 다녀간 것 같지만, 정황상 그런 얘기는 없다. 프라하의 봄 때 Hey, jude가 주제곡으로 불리웠다고 하지만 그건 나중 이야기.
다만, 반전의 아이콘이었던 존 레논이 1980년 암살 당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벽화가 꾸준히 소멸되고 재탄생하며 오늘 날에 이르렀다고 한다. 존 레논의 얼굴 위로 다양한 언어로 다양한 소망들이 버무러져 있다.
그리고 All you need is 사랑.
4. 어느 째즈 바
몇 해 전까지 내게 째즈라 하면 터보의 어느 째즈 바와 신해철의 재즈카페가 전부였고 소주, 맥주만 먹던 사람이 와인을 접하듯 거리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라라랜드를 거치고 재즈바를 방문하며 가사가 없는 단지 “음악”이 주는 감동에 흥미를 품게 되었다.
그렇다. 돌고돌아 프라하의 어느 째즈바에 왔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서사를 깔았다. 물론 “어느” 째즈바지만 “아무” 째즈바는 아니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이가 본인의 추억이 묻어나는 곳에 꼭 한 번 방문해주기를 추천했고 프라하의 야경을 뒤로 한 채 지하의 어느 음침한 바로 향했다. 물론 아무도 안 지키는 방역수칙을 준수하기 위하여 마스크를 최대한 끼고 있지만.
피아노, 비올라 - 맞나? -, 드럼으로 이루어진 3인조는 몇 안되는 관객 앞에서도 본인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열정적인 연주를 이어갔고 허름한 재즈바가 주는 풍취를 남김 없이 느낄 수 있었다가. 게다가 우리나라였으면 만원쯤 했을 생필스너를 3천원에 딱. 알만한 시그니처 곡들을 연주했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홀로 오롯이 재즈를 느낄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충분히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실상 프라하에서 첫 날인 긴 하루는 이렇게 무사히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