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1.느긋한 기상
호텔에서 편하게 자다가 게스트하우스에서 자려니 좁긴 좁다. 원래 여기서 열흘을 보내려 했던 것을. 인간은 이렇게 간사하다.
느긋한 일요일의 아침을 챙겨놓은 컵라면으로 맞이해본다. 한국에서는 어쩌다 한 번 먹는 라면이지만 고향의 맛도 느껴야 하거니와 2인분으로 챙겨왔으니 짐도 줄여야지. 출국시까지 매일 아침은 라면이다.
2. 일요일 오전의 여유
체스키 크롬노프 일정 취소로 여유롭게 계획했던 일들을 하기로 한다. 속옷이랑 양말을 3-4일치 밖에 준비 안했기에 여정의 반을 도는 시점에는 한 번 세탁이 필요했다. 동남아에선 지나가다 보이는 세탁소에 맡기면 다음 날까지 알아서 건조까지 싹 해주었었기에 - 손으로 두드린 것 같긴 하다만 - 어떻게든 되리라 생각하고 짐을 싼 바 구글맵을 돌려 인근 세탁소를 찾아갔다.
오, 심지어 코인이다. 속옷, 양말과 셔츠, 라이언 잠옷 뿐이라 가격이 저렴한지는 모르겠으나 도합 8천원 정도에 건조기까지 싹 돌리고 나니 또 하나의 숙제를 해결한 느낌. 게다가 가장 좋아하는 악어 흰 셔츠는 깨끗하게 세탁되었으니 그걸로 됐다.
다음 행선지는 우체국. 시내를 걷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냉큼 들어섰다. 국내여행을 할 때도 느린 우체통을 보면 참지 못하고, 많지 않은 해외여행 경험에서도 한 장의 엽서가 남기는 진한 추억의 여운을 잘 아는 바, 우체국에 들려 몇 자 적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일요일인데도 문이 열려있길래 뭐지 싶었는데 영업시간이 오전 2시부터 자정이란다. 대단한 프라하.
집에서 오매불망 내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부인에게, 부인만큼이나 걱정하고 있을 위례 가족들에게, 그리고 해외 나가면 한 장씩 엽서를 주고 받던 봉 가족에게도 안부를 전해 보낸다. 엽서를 썼다는 카톡에 엽서가 도착할 때까지 행복할 거라는 부인의 대답이 심금을 울린다. 그대여, 나의 여우여!
3. 비셰흐라드
여행에도 휴식이 필요하고 일요일은 더욱 그렇다. 빡센 일정이 필요 없어서 오전의 볼 일을 마치고 난 후에 부인이 프라하에서 가장 좋았다고 했던 비셰흐라드를 찾아 나섰다. 시내에서 2km 남짓. 트램으로 15분이지만 더 여유를 즐기고자 블타강을 탈아 무작정 걸었다.
30분쯤 걸었을까. “고지대의 성” 이라는 뜻을 가진 비셰흐라드는 성페트르, 파블 성당과 드보르작, 알폰 무하소등 체코의 위인을 모신 국립묘지로 이루어진 공원이다. 전망대는 따로 없지만 주변 일대를 조망할 수 있어서인지 현지인들도 즐겨 찾는 공원이라 한다.
을씨년스런 날씨에 텅 빈 벤치에서 생코젤 시켜놓고 토이의 라이브 앨범을 들으며 여유를 즐겼다. 휴식이 아닌 관광을 주로 하려다 보니 이런 여유는 처음. 사실 한강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여유인데 - 심지어 뷰도 한강이 더 아름답다 - 서울에선 이래저래 한동안 잊고 지낸 여유가 아니었나 싶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바쁘게 돌아가는 게 서울에서의 삶이니.
괜시리 부인 생각이 나서 페이스톡을 걸었는데 안 받는 걸 보면 자는가 보다. 한국시간 밤 10시 반이지만.
주말 당직은 참으로 피곤하다. 불철주야 나랏 일로 고생 많은 우리 공무원들 화이팅.
4. 오늘 밤 내 방엔 파티가 열렸지
그대를 위해 준비한 꽃은 어느새 시들었지만 나는 시들지 않았기에 혼자 파티를 준비했다.
블타강 근처를 걷다가 우연히 한인마트를 발견하고 - 심지어 점원도 한국인! - 소주나 사야겠다 싶어 들어가니 7천원. 아무리 애국자여도 그 정도 지출을 할 수는 없지. 혹여나 하고 둘러보니 김치도 있는 게 아닌가! 하도 육식만 해서 김치에 밥만 먹어도 맛있을 것 같던 바, 시원하게 만원 쓰기로 한다. 생코젤 4잔 정도 덜 먹지 뭐. 덜 먹을 리는 없다.
김치까지 챙기고 나니 갑자기 자신감이 생겨 테스코를 찾았다. 게스트하우스에 위생적인 조리시설이 갖추어져 있던 것 같던데, 삼겹살 슬쩍 굽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OMG. 국산 - 물론 체코 산 - 삼겹살 320g에 3,500원. 일단 시험 삼아 저 정도만 구비하고 맥주만 먹었다가는 살 찔 것 같아 위스키도 하나 구비했다. 5천원. 여러 모로 좋은 나라다.
자 모든 게 준비됐으니 이제 굽기만 하면 된다. 위생적인 조리시설에는 생산연도를 알 수 없는 소금도 구비되어 있다. 사실 소금은 생산연도를 알 필요가 없다. 괜히 빛과 소금이겠는가. 소금까지 착착 뿌리니 한층 더 영롱해진 자태. 이미 맛있다.
굽는 동안 햇반 - 스타일 노브랜드 즉석밥 -을 돌리고 김치 깔고, 맥주와 위스키 세팅, 터키즈 온더 블럭까지 준비하니 한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다만, 이 광경이 10년 전의 화천인지 지난 주의 서울인지, 지구 반대편의 프라하인지는 모르겠으나.
5천원짜리 위스키는 역시 5천원 맛이다. 몸에 좋은 게 입에 쓴 데는 이유가 있겠지. 건강을 생각하며 까르로비 바리에서 구비한 온천수 잔에 나홀로 나즈드라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