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_빅히스토리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무려 ‘우주’의 역사(‘인간’의 역사가 아니다. 인간의 역사를 포함한 우주의 역사이다)를 조망할 수 있는 하나의 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복잡성 증가’를 우주의 역사가 진행되는 힘으로 꼽는다. 우연한 조건의 일치로 ‘복잡성’이 증가하게 된 8가지 순간을 통해 빅뱅에서 4차 산업혁명 인간의 시대까지를 면밀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살핀다. 그런데 복잡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해한 바대로 거칠게 비유하자면 이렇다.
거대한 성 안 작은 방에 촛불 하나가 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촛불은 조용히 탄다. 가끔 바람도 불고 습도도 변해 초가 조금씩 흔들리기는 하지만 큰 변화는 없다. 초는 주어진 범위 안에서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고요하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촛불이 정말 우연히, 하필 어떤 바람이 불어서 흔들리던 범위를 넘어 불씨를 튄다. 불씨는 방의 벽에 붙는다. 작은 불씨는 점점 커진다. 방을 태우고 복도를 태우고 그렇게 성을 홀라당 태운다.
홀라당 타버리는 이 과정이 ‘복잡성 증가’이다. 우연한 바람이 성 전체를 태워버리는 것처럼 우연한 물리적 변화가 우주 전체의 구조를 바꾸었다. 한 예로, ‘빅뱅’은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촛불)으로 고요하던 구조(성)에서 양자요동(바람)으로 일어난 ‘첫 번째’ 복잡성 증가이다. 그 이후 7번을 더 타는 과정을 거쳐 인간은 지금 여기에 도달했다.
비유를 통해 알 수 있지만 이 책은 가치중립적인 구조와 우연한 구성요소들의 배열이 우주의 역사를 움직인 거대한 힘으로 보는 듯하다. 철저한 과학적 사고방식이다. 역사를 특정 민족의 생존 이유와 정치적 의미로 보거나 인류가 우주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중점을 둔 사람, 그러한 시각을 가진 사고방식 및 역사관에 익숙하다면 허무하고 공허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중심적 서술이 ‘이야기’가 아닌 것은 아니다. 이야기의 필수 요건이 등장인물과 사건이라면 건조한 사실 기술만으로도 그 요건은 충족된다.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등장인물이며 지금 내가 하는 일을 포함한 모든 것이 사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덮고 스스로 거대한 우주 이야기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체감하며 경이로움을 느꼈다.
동시에 나 역시 우연한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공허해지기도 했는데 책을 다시 뒤적이다 본 서문을 보고 금세 생각이 바뀌었다.
“인류세에 접어든 이래 유례없는 도전 과제에 직면하고 새로운 ’ 문턱(복잡성증가)‘을 앞두고 있을지 모른다는 전망에 대처해야 하는 오늘날의 사피엔스에게 빅 히스토리의 모든 것을 담은 이 책을 바친다.
우리는 낙관주의자다. 새로운 세대들이 눈앞의 거대한 도전과 변화를 헤쳐 나가는 데 빅히스토리라는 모든 분야를 폭넓게 아우르는 관점이 훌륭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의 우리는 우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앞으로도 우연적 사건이 인류의 미래를 결정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스스로가 우연의 산물임을 인지하고 앞으로의 우연에 ‘의지’를 개입시킬 수 있는 첫 번째 세대이다. 지금껏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선택권을 이토록 많이 가진 종이 있었던가? 나는 허무주의에 정면으로 맞설 용기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