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_애스터로이드 시티
러시아 인형을 형상화한 것 같은 이야기 속 이야기 구조는 웨스 앤더슨 영화의 특징이다.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 프렌치 디스패치의 경우 그 구조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는 그 구조의 쓰임새가 상대적으로 명확했다. 이야기 속 이야기에서 탈출하는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엄밀히 말하면 영화의 제목이 아니라 영화 속 극의 제목이다.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실제 이야기도 엿볼 수 있다. 외계인, 과학박람회, 어머니 혹은 부인의 죽음, 인기배우와의 은밀한 교감. 이 모든 것들을 혼란스럽게 겪는 중심인물 배역 배우가 극 도중에 극에 대한 설명을 호소하며 뛰쳐나온다. 이 모든 것들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라며. 그는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감정과 이야기를 표현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 질문은 관객이 던지고 싶은 질문이었다. 대체 외계인은 왜 나오고 이를 둘러싼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무슨 의미인가? 동시에 더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왜 이해할 수 없는 이 영화 앞에서 앉아있는가. 우리는 대체 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겁도 없이 들어가는가. 이런 이야기가 현실에 무슨 쓸모가 있는가.
웨스 앤더슨은 이렇게 답한다. 이야기 속에 ‘잠들지 않으면’ 현실에서 ‘깨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뛰쳐나온 배우는 함께 연기를 했지만 사정상 분량이 사라진 극 중 아내 역할의 배우를 우연히 만난다. 그리곤 술잔을 맞부딪치는 듯 극 중 대사를 추억 서린 목소리로 주고 받는다. 그 순간 만큼 그들 사이의 현실은 흑백영화 속 컬러 오브젝트처럼 다른 현실과는 다르다. 그들은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이야기 극 속에 함께 잠들었다 깨어났기 때문이다. 어쩌면 외계인이니 사랑이니 하는 이야기 속 의미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야기에 빠졌다가 나오는 행위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므로. 앤더슨의 영화가 들어갔다 나오기 좋은 공학적 구조물 같은 형식을 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야기에 빠졌다 나오는 것을 하나의 우주를 마주하고 현실로 돌아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우주를 마주한 사람들을 발견하고 깨어난다. 작가 김영하는 산문 ‘읽다’에서 이렇게 썼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는 어떤 우월한 존재가 책이라는 대량생산품을 소비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책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아주 잠깐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바로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바로 우주입니다. 이야기의 세계는 끝이 없이 무한하니까요.’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의심의 여지 없는 ‘우주’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