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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만 좋은 사람 반대할래

<첫 줄> 심보선 시인의 그 문장

<첫 줄>
첫 줄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써진다면
첫눈처럼 기쁠 것이다.
.........

- 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 중



1.  빈 커서 위  권력자 '첫 줄'

글을 써본 사람은 안다. 빈 커서가 반짝거리는 모니터 화면에서 '첫 줄'이 주는 의미를. 첫 줄이 써진다면 나머지도 쉽게 써질 것 같고 첫 줄을 못 쓴다면 나머지 문장까지 말아먹는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든다는 거. 그렇기에 첫 문장이 유명한 책들이 오래오래 회자되는지 모르겠다. 첫 문장이 어떤지에 따라 나머지 문장을 계속 읽을까 말까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독촉하듯 계속 반짝반짝거리는 빈 커서는 나의 조바심을 이용해 줬다 폈다 하며 마음을 흔든다. 빈 커서 위에 '권력자가 되고 마는 첫 문장'처럼 사람과의 만남에서 '첫인상'도 무시할 수 없는 강렬한 무엇이다.    




2. 첫인상으로 알아봤지, 천재 소년

첫 인상하면 이때가 생각난다. 학생 대상 퀴즈 프로그램을 할 때다. 제법 역사가 오래된 퀴즈 프로그램이었는데, 내가 프로그램을 맡았을 때 갑자기 '일반 상식'이 아닌, '주제별' 퀴즈 대결로 형식이 바뀌었다. 예를 들면 조선 역사, 삼국지, 세계사, 문학, 전쟁사, 우주 같은 주제들. 일단 주제가 정해지면 학교의 추천과 예비 시험을 보고 개인 인터뷰를 거쳐 출연이 결정된다. 매주 주제를 선정하고 전문 출제자를 의뢰하고 문제가 오면 검토하고 바꾸는 과정은 일반 상식 퀴즈 때보다 훨~~~ 씬 품은 많이 들었지만 덕분에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학생들, 일명 오타쿠 기질의 학생들을 꽤 많이 만나며 감동적인 순간들이 있던 시간이다.   


그 주의 주제는 '우주'. 작가진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문과생들이라 이과 문제는 더 힘이 많이 들었다. 먼저 총 10개의 예비문제를 의뢰하고 출제 선생님은 변별력을 위해 마지막 문제는 최고 난이도의 물리 주관식 문제를 내주셨다. 예선전을 치러보니 문제가 어려워서인지 세상 똑똑한 학생들도 절반을 맞히기가 쉽지 않았고 그 어렵다는 마지막 문제 정답자는 찾을 수가 없었는데.... 유독 눈에 띈 한 명의 학생.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 어려운 마지막 주관식 문제를 맞힌 유일한 정답자였다! 과정도 완벽! 주인공은 한국영재학교에 다니는 학생으로 인터뷰를 해보니 말도 잘하고 관심사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쏟아내는 스타일! 첫인상만으로 모두의 눈에 띄는 천재소년이었고 그 주의 우승자는 그 천재 소년이었다.




3. 연말 우승자와 해외캠프

매 주제를 바꿔가며 한 해를 보내고 하이라이트는 연말 결승전. 날고 기는 실력 좋은 학생들끼리 경쟁도 치열하고 학교의 명예도 달려있고 상금인 장학금의 액수도 큰 편이라 모두 예민해지는데 반면, 여기에 오기까지 여러 번 만나면서 제작진이나 출연진들도 서로 많이 알게 되고, 정이 들게 된다.


드디어 마지막 결승전. 예상만큼 치열했고 실력만큼이나 운도 따라야 한다. 비슷한 실력이라 누가 실수를 안 하고 점수를 지키느냐가 관건! 그렇게 최종 우승자는 '첫인상'이 강렬했던 천재 소년이 아닌,  (조금 덜 튀는 성실한 학생) 다른 학생이 되었다. 막판 뒤집기가 아닌 실수 없이 꾸준히 점수를 얻으며 최종 우승자가 되었다. 우승자에게는 거액의 장학금이 수여되고 상금은 못 받아도 결승전에 참가한 모든 학생들에게 해외캠프가 부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마지막 촬영은 모두 웃으며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다.

 



4. 왜 처음만 좋았을까?

그 후, 나는 여학생 인솔자라는 이름으로 4박 5일을 중국 해외캠프에 같이 가게 되었다. 며칠을 보낸 시안을 출발해 기차에서 1박 하며 북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며칠을 보내며 친해졌다고 모두 기차 한 칸에 모여 웃고 떠들며 노는데, 천재인 그 아이만 없다. 어디를 갔나 찾아보니 다른 칸에서  처음 만난 중국 아이들과 웃고 떠든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도 처음 보는 중국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 아이는 그곳에서 환영받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강렬한 '첫인상'처럼.


하지만 궁금했다.몇 번의 경쟁을 함께 치르고 며칠을 같이 보낸 한국 친구들과는 왜 잘 지내지 못할까? 분명, 처음 만났을 때는 다른 아이들도 그 아이의 천재성에 반해 호감을 보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의 마음이 멀어지는 걸 보게 되었다. 천재 소년은 본인이 관심받는 것만 집중한 나머지, 상대가 불편해하는 것들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고 이 일들이 쌓여서 다른 학생들도 이와 비슷한 마음이었던 . 단지,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왜, 처음만 좋았을까? 왜, 처음 만난 사람들한테만 좋은 '첫인상'을 남기고 호감을 사는 걸까? ‘순간’의 선택으로 다가오는 '첫인상'. 그 이후부터는 내 시간을 들여서 쌓아야 하는데 그걸 안 한 거지. 최종 결승전에  오기까지 서너 번은 만났을 친구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점을 눈치챈 것이다.  같이 먹고 자고 하는 4박 5일은 숨기고 싶어도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충분한 시간일 테니까.


그 아이를 보면서 사람들이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가 가장 좋았던 사람. 시간이 지날수록 안 좋았던 사람들. 처음만 좋은 사람들.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잘하고 정작 같이 지내는 사람들에겐 막 하는 사람들. 어쩌면 가장 오래 보고 길게 보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소홀하지는 않은지. 가족이란 이름으로, 오래된 친구라는 이름으로.




5. 시간이 그리는 인상, 뒷 인상

첫인상의 중요성에 관해서 많이들 얘기한다. 첫인상을 결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8초 이내! 한번 결정된 첫인상은 바꾸기 힘드니까, 좋은 첫인상을 얻는 법에 관한 얘기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의 힘이 쌓아가는 ‘뒷 인상’의 중요성은 왜 알려주지 않는 것인지. 한순간으로 결정되는 ‘첫인상’보다 시간이 쌓아 올린 ‘뒷 인상’이 좋기란 더 힘든 법인데. 정작 이것들에는 소홀하다.  처음이 제일 좋았던 관계들에서 온 실망을 생각하면, 오래 보아야 할 사람들에겐 ‘뒷 인상’이 더 중요해진다.


그렇다. 첫 문장이 유명한 것도 좋지만 두꺼운 벽돌 책을 읽을 때면 280페이지가 넘어서 흡입력이 있는가가 실력이라고 누군가 말해주었다.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서문만 보지 말고 뒤부터 펴보라고! 일리 있는 말이다. 다큐멘터리 원고를 쓸 때도 마찬가지 법칙이 적용된다. 5~60 분 남짓한 구간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은 28분을 넘긴 이후다. 중반 이후 가장 힘이 달린다. 처음에는 힘들이지 않고 흥미를 끌 수 있고, 결말에도 할 말이 정해져 있는데, 중반을 넘어서는 이 구간이 '마의 구간'이다. 여기를 잘 넘겨야 마지막 결론에 연착륙할 수 있건만 그만큼 후반전은 더 어렵다. 마라톤 풀코스도 비슷하단다. 42km 구간에서 30km를 넘어서는 구간, 특히 35km를 '마의 구간'이라고 하는 걸 보면, 시간이 그리는 일들은 뒤로 갈수록 진짜 실력이 드러나는 것 같다. 일의 완성을 위해서는 '뒷심'이 절실한 이유도 마찬가지겠지. 인생에서도 중년 이후를 잘 살아내기 힘든 것처럼.


첫 줄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써진다면 첫눈처럼 기쁠 것이다

'첫 줄'의 어려움과 첫 줄의 환희를 보여주는 심보선 시인의 첫 줄을 여전히 너무나 사랑한다. 하지만 첫 줄만 쓰다만 나의 글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겁다. 무릇, 시작만큼이나 시간이 밀고 나가는 힘으로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젠 알아버렸으니까. 시간의 힘. 이것은 벼락치기가 불가능하다. '첫인상'의 잠깐은 나도 속이고 상대로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을 들이는' 관계인 '뒷 인상'은 벼락치기가 불가능하단 것. 시간이란 놈이 그래서 가장 무섭다.  공평하고 부지런한데 거기다 인정머리 없다. 긴 시간이 그려놓은 관계란 결국, 뽀록이 나기 미련이니까. 첫인상에 집착 말고 시간이 그리는 '뒷 인상'을 기억하라! 처음만 좋은 사람, 처음만 좋다가 말지는 말지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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