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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하한가_그때 왜 그랬니?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시인의 그 문장  

<너를 기다리는 동안>

......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


着語 : 기다림이 없는 사랑이 있으랴. 희망이 있는 한,
희망을 있게 한 절망이 있는 한, 내 가파른 삶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한다.
.........
너도 이 녹 같은 기다림을 네 삶에 물들게 하리라.   


- 황지우,  << 게 눈 속의 연꽃>> 중



# 1. 엄마의 뜻밖에 질문

동네 주민인 엄마와  밤 산책을 나섰다. 그날따라 살랑거리는 바람이 몸에 닿는 느낌이 좋아서 혼자 분위기에 취해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물었다.


" 너, 그때 왜 그랬니?"

" 그때? 엄마. 그때?......"

" 그래, 그때..."



엄마가 말한 '그때'란 30년쯤 전, 고등학교 2학년이던 시절 어느 평화롭던 토요일 오후의 일이다. 아직도 그날의 분위기와 공기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은 약속이 있었던지 외출한 상태고 동생은 어디에 갔는지 집에 나 혼자였다. 조금 있으면 tv에서 내가 좋아하는 외화시리즈를 시작할 시간인데 그날따라 모든 게 재미없고 지루하게 느껴져 tv도 켜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기분 나쁜 일이 있거나 불만스러운 일이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 토요일 오후, 난 모든 게 지겹다고 느껴졌다.


남들이 보면 모범생이었다. 단짝 친구도 있고 친구관계도 무난하고 성적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부모님도 스트레스를 주는 타입도 아니셨다. 사고를 치거나 문제가 있던 고등학생이 아닌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 그런데 어제와 똑같은 오늘.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잘 버티고 있었지만 이번 주말이 지나면 다음 주도 이번 주처럼 똑같이 쳇바퀴 돌듯 지나갈 텐데. 아침 일찍 일어나 스쿨버스 타고 학교에 가서 하루 종일 수업받고, 수업 끝나면 특수반 독서실에서 야간 자율 학습하면서 보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왔다. 

 '아...... 다음 주가 오지 않았으면......'. 단지, 그 마음뿐이었다.




#2. 어느 토요일 오후, 그 사건

옷장을  열어보니,  아빠 넥타이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그중 하나를 꺼내 목에 감았다. '아~이렇게 하면 다음 주 편안해질 수 있을 거야'라는 마음으로... 못에 넥타이를 걸고 버둥거리는 그 순간.

현관문이 '딸칵'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엄마가 들어왔다.  예상보다 일찍 집에 온 엄마가 나를 목격하면서 나의 자살사건은 미수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엄마는 나를 혼내거나 '미친년'이라고 욕을 하거나, 울거나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거짓말 같지만 나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다. 그 이후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백지처럼 하얗다.


고2 때, 대형 사고를 친 당사자인 나는 그 사건을 까맣게 잊고 30여 년을 보냈는데, 오늘에서야 엄마가 내게 가슴에 묻어둔 그 질문을 한다. 30년이나 묻고 싶었을 그 질문.  오랜 기다림 끝에 엄마가 내게 묻는다.

 

"그때 왜 그랬니?"라고.

 얼마나 오랫동안 맘 졸이며 가슴에 품고 있던 질문이었을까?


"...... 그냥"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진짜 '그냥'이었다. 심각한 불만이 있거나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다음 날이 안 왔으면 좋겠다는 단지 그 마음 하나로 저지른,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건. 돌이켜 생각하면 엄청나게 심각한 사건이지만, 당시 난 그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몰랐다. 그 이후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 뭐, 그냥?"

뭔가 대단히 거창한 이유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이라는 답변을 듣더니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나한테 엄마가 말을 건넨다. 그날 이후,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봐 엄마는 네 옆에서 계속 같이 잠을 잤다고. (기가 막히지만, 이것도 난 기억에 없다. 독립적인 성격이랍시고 난 어릴 때도 엄마와 자지 않던 아이였는데..) 겉으로는 어른스러운 척, 멀쩡한 모범생인 것처럼 굴었지만 아마 당시 내 마음속은 몹시 어둡고 예민하고 까탈스러웠던 면을 숨기고 있었던 듯싶다. 그런 내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이 정도의 평범한 어른으로 자란 건 그때 나를 다그치지 않고 품어준 엄마 덕이다. 그래서 가끔 욕심 없는 아이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마다 난 생각한다. 나처럼 큰 사고 치지 않고 몸 건강하고 마음 건강하게 잘 자라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3. 내 인생의 하한가의 고백  

그 이후, 나는 누구나 특별한 이유나 문제없이도 사람이 한순간 무력하고 약해질 때가 있다는 걸 안다. 우울증이라거나 공황장애라거나 특별한 병명을 붙이지 않아도, 그럴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란 걸.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어린 날의 난 왜 그랬을까? 한동안 '나'를 위주로 생각하다 자리를 바꿔 '엄마'의 자리에 서서 본다. 서있는 자리마다 풍경이 달라진다더니, 엄마의 자리에서 본 풍경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생각하면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였다. 엄마는... 엄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식을 키워보니 아이가 조금만 늦어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불안한데, 엄마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오랜 시간 어떻게 견뎠을까?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의논했을까? 아니면 우리 집 앞 성당에 가서 매일매일 기도했을까? 혹시, 내가 학교 간 사이에 소리 내서 울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엄마가 나를 다그치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기다려준 것만큼은 확실하다. 마치 문이 열릴 때마다 놀라는 심정으로, 나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불안'이 문을 열고 들어올까 봐  '불안'과 '괜찮아' 사이의 회전문을 무한 반복하며 돌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황지우 시인의 글을 볼 때마다 '기다림'이란 대목이 문턱처럼 걸린다. 오랜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던데, 엄마는 나 때문에 얼마나 '녹 같은 기다림'의 세월을 보냈을까... 내가 다시 제 자리에 돌아오기를 오랜 세월 동안 천.천.히 기다리며 버텼을 엄마가 그려진다.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 너도 이 녹 같은 기다림을 네 삶에 물들게 하리라.   

30년간의 비밀을 가슴에 품고 내 대답을 기다려준 엄마. 만약, 그날의 사건에 대해 엄마가 당사자인 나보다 더 놀라고 흥분하고 힘들어했다면, 그 시절 예민하기 짝이 없던 나는 이토록 까맣게 잊고 아무렇지 않게 살지 못했으리라. 아마 사건을 곱씹고 곱씹으며 되새김질하며 보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긴 세월 기다려준 덕에 그 일은 '상처'로 남지 않고 백지'처럼 지워질 수 있었다. 그러니까 30년이 지난 후, 엄마가 물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사건을 떠올릴 수 있었겠지. 아마도 인류사에서 가장 극한의 직업은 '엄마'이지 않을까. 시작도 끝도 없고 완성도 없는 직업. 덕분에 한 인간이 제대로 어른이 될 수 있는 직업. 어쨌든 이건 부끄러운 나의 인생 하한가에 대한 '뜨거운 고백'이자, 인생 하한가에서 날 탈출시켜준  엄마의 오랜 기다림에 전하는 감사와 미안함의 편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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