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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체가 제일 그 사람 같아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조태훈의 그 대사

“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이상하게 아버지 필체가 제일 아버지 같더라고요.
옷을 봐도 사진을 봐도 그냥 그런데, 필체는 이상하게 진짜 아버지 같았어요.
팬대 잡는 분이 아니셔서 전화번호 수첩 하나 있었는데, 그걸 매일 봤어요. ”     


<나의 해방일지>, 조태훈의 대사



             


1.   

고등학교 단짝 친구들과 공동 일기를 쓴 적이 있다. 한 사람이 일기를 쓴 뒤에 다른 사람 책상 서랍에 넣어두면 이어서 쓰고 또 서랍에 넣어두는 식으로 쓰는 공동 일기. 공동 일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우리들이 심혈을 기울인 일은 일기장 고르기였다. 고등학생 티가 나지 않는 세련된 느낌의 노트. 그렇게 심사숙고해서 고른 건 '천지창조'의 명화가 그려진 온통 블랙인 특별하고 시크한 노트가 우리들의 첫 공동 일기였다. (아직도 그 표지가 선명하다)   


2.   

문과 이과로 나뉘고, 같은 반이 아닐 때도 3년 내내 붙어 다니며 유난을 떨던 단짝 친구 넷. 하지만 그 시절이 아니었다면 결코 친해지지 않았을 타입의 완전 다른 성격과 취향을 가진 친구들이다. 개성 강한 넷이 각자의 이야기를 이어서 쓴 공동 일기는 1년쯤 쓰면서 한 권이 완성되었다. 그 후 입시 준비로 바빠서 잊고 지내다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성인이 되어서야 원본을 가진 친구가 제본을 해 나눠준 덕분에 각자 한 권씩을 갖게 되었다.


3.   

제본한 공동 일기(아쉽게도 천지창조 표지가 없는)를 받고 노트를 펼쳤을 때, 먼저 들어온 건 글씨체!  누가 쓴 건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각기 다른 글씨체는 우리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부드럽고 따뜻한 친구는 그림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글씨체. 시험을 보다가 학교 담을 넘을 정도로 엉뚱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친구는 크고 각진 글씨체. 천재 스타일의 과학 하는 친구의 글씨체는 글자 하나하나를 떼어보면 완벽한데 이어놓으면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해서 어디에 있어도 찾아낼 수 있을 독특한 개성이 보였다. 글씨체만 봐도 제각각의 인간형이다.                     




“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이상하게 아버지 필체가 제일 아버지 같더라고요.
옷을 봐도 사진을 봐도 그냥 그런데, 필체는 이상하게 진짜 아버지 같았어요. "



4.     

글씨체가 뭐길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대사를 듣고 처음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인의 유품이 얼마나 다양한데 왜 필체가 제일 아버지 같다고 한 거지. 작가는 어떤 생각이었던 걸까. 뭔가 건너뛴듯한 대사는 공감이 가지 않아 한 줌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드라마의 저 회차가 나간 후에 시아버지 상을 당하면서 내 일처럼 다가오는 일을 겪게 됐으니, 세상 참 모를 일이다.


5.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품 정리라는 이름으로 물건들을 정리해야만 했다. 단정하게 살다가 가셨는데도 고인의 유품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중에는 많은 사진들, 이불, 옷가지, 선물로 드렸지만 뜯지도 않은 채 있던 패딩, 아끼느라 쓰지 않은 은수저 세트들. 운동을 하시면서 받았던 메달도 꽤 있었다. 그런데 유품들 가운데 계속 생각나는 건, 침대 머리맡에 있던 작은 종이조각들이다. 버릴까 하다 들고 오게 된 이유가 있다.


6. 

사실, 아버님은 글씨를 잘 쓰는 분이시라 가끔씩 아들인 남편과 며느리인 나한테도 손편지를 보내셨다. 그 시대 분들이 그렇듯이 꼭 한자를 섞어서 '건강해라, 행복해라'로 끝나는 편지들. 이번 유품 중에도 써놓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를 발견했다. 그중엔 '사랑하는 나의 신자여~ '로 시작되는 구구절절한 편지 한 통. 그건 어머니가 처음 아프셨을 때 옆에서 보기 힘든 마음과 건강 회복을 위해 꼭 할 일들에 대해 적은 5장의 편지로 안타까움과 사랑이 구구절절 쓰여있었다.  


7. 

또 하나는 침대 머리맡의 작은 종이들. 처음엔 낙서인 줄 알고 버릴까 했는데  거기에는 가족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주민등록번호까지 반복해 적혀있었다. 그것도 한두 장이 아니라  여러 장. 종이 크기도 들쭉날쭉 같지 않았고 새 종이가 아까워 이면지에다, 혹은  자투리 종이마다 자식들 이름과 손주들,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름과  생년월일, 돌아가신 기일과 돌아가신 장소. 거기다 친척들 이름과 생일, 전화번호가 가득했다. 종손으로 챙겨야 했던 가족과 친척들의 이름. 낙서인 줄 알았던 종이조각들에는 반복해 적은 가족들의 이름이 있었다.    


8. 

처음엔 반듯반듯 정자체로 쓴 글씨는 뒤쪽으로 갈수록 뭉개져있다. 조금씩 뭉개지고 겹쳐 써져 알아보기 힘든 글씨들. 예전에 글씨체 좋던 아버님 글씨 같지가 않다. 몸이 아프고 나중에 경증 치매 증상이 나타나면서 글씨도 조금씩 뭉개지고 있었던 것.  스러져가는 육체의 흔적이 글자에도 고스란히 드러난 걸 보자, 눈물이 툭 떨어졌다. 다른 유품들은 웃으면서 이랬구나 저랬구나 추억할 수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렇게 아픈 몸으로도 '가족'들을 기억하려고 애쓰고 계셨구나.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게 가족이었구나.  


9. 

남은 물건들은 내 맘대로 혼자 추억하면 그만이었는데, 뭉개진 필체를 보자 그게 아니었다.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져 있는 느낌. 글씨체가 마치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서야 필체가 가장 그 사람 같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아졌다. 그때는 혼자 쓴 글씨였겠지만, 남아있는 필체는 마치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다. 가장 현재의 그 사람이, 필체에 남아 내게 말을 걸고 있다. 그렇게 조각보같은 종이에 쓴 메모는  내가 기억하는 아버님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10. 

누군가 장례식장에서 내게 말했다. 남아있는 사람이 보면 마음 아프니까 아무 글도, 아무 말도 남기지 말라고. 막상 경험하고 나니까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것만 같다. 물건은 버리거나 사라지면 그만인데, 누군가 남긴 말이나 글은 지우려고 할수록 마음속에 더 또렷해진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래서 낙서 같은 이 종이조각을 버리지 못하고 모시고 올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그냥 낙서일 뿐인데 나한테는 '마지막 일기이자 유언'처럼 보여서. 말로 전하진 못했지만 끝까지 붙잡고 싶었던 한 가지가 가족이었음을, 한발 늦게 알게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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