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봉인 해제 : 분홍 미니 스커트

드라마 <최고의 이혼>,  배두나의 그 대사

좋아하는 사람과는 생활하는 데서 마음이 맞지 않고
마음이 맞는 사람은 좋아지지 않아요.
애정과 생활은 항상 부딪히고 뭐랄까.
그건 내가 쭉 안고 가야 하는 성가신 병처럼 느껴집니다.

 
- 드라마 <최고의 이혼>, 배두나의 대사 -




# 0.

분홍 미니 스커트를 입고... 이것은 내가 쓰고 싶었던 소설의 촌스러운 제목이다. 시간이 가도 안 잊히는 그녀의 이야기를 언젠가 소설로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그런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아 그냥, 쓴다.




# 1.

그녀는 회사 동기다. 동기였다. 출중한 미모로 인기가 많아 다들 사귀고 싶어 안달이었던 인물로,  입사 때부터 소문이 무성했다. 소문에 의하면 군에서 스타인 남자 친구 아버지의 청탁으로 입사했다 하고, 그 남자 친구는 이미 '전 남친'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나는 잠시 준비하던 임용고시를 접은 후, 몇 차례 원서를 넣고 떨어지는 쓴맛을 본 터라 이 이야기를 들으며 ‘뭐야, 예쁘면 술술 풀리는 거야, 이런  더러운 세상!’이라며 씁쓸해했지.




# 2.

화려한 소문과 달리, 실제로 만난 그녀는 조용하고 튀지 않는 인물이었다. 몇 번 말을 섞으며 '비호감'은 '호감'으로 바뀌고 술 마시면 재밌어지는 타입임을 알게 되었다. 첫 회사생활을 하며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에도 분개하고 씩씩거리는 나와 다르게, 모든 문제를 아무 감정도 싣지 않고 쿨하고 가볍게 넘기는 그녀의 태도는 무척 신선했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는 미니 스커트! 화려한 미모의 그녀는 회사 안에서는 조용했지만, 은근 술에 관한 에피소드는 많았다. 무표정한 얼음 미녀는 술만 들어가면 잘 웃고, 웃긴 이야기도 잘하고 가끔 술 마시면 모르는 사람들한테 받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쪽지가 손에 쥐어져 오는 해프닝도 많았다. 그중 대박은 회사 야유회였지. 행사 내내 조용히 술만 마시던 그녀가 관광버스에 올라타서는 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팀장 자리로 가더니 대머리 팀장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 어머, 머리가 대머리네, 히히~ "하고 김 붙인 이빨을 보이며 씩 웃던 장면은 회사 안에서도 이슈가 된 초대박 사건이었다.  




# 3.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우린 동갑이고 극과 극이라 통하는 면이 있었던지 우연히 둘만 여행을 간 적도 있다. 시시콜콜 수다 떠는 타입이 아니라는 점은 비슷했고  서로를 궁금해하지 않는 적당한 무관심과 침묵, 뭔가 믿거니 하는 마음이 통했던 걸까. 그녀와는 아무 대화를 안 하고 있어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역시 그녀의 '미모'는 여행지에서도 통했다. 우리가 가는 숙소와 식사 장소는 모두 회사의 지방 지사 남자 직원들이 알아봐 준 것이었으니 말 다했지. 부탁한 것도 아니고 여행 간다는 이야기만 전했을 뿐인데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미녀는 괴로워’라고 누가 그랬던가! 아니 ‘미녀는 다 돼~’의 세상. 회사 내 젊은 남자들은 뭘 해주지 못해서 안달이었지만 정작, 그녀는 모든 일에 무덤덤했다. 모두 그녀가 좋다고  난리인데도 그녀는 아무도 맘속에 담지 않고 친절했지만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다. 경계가 없어 오히려 모두에게 오픈된 듯 보였지만 도넛처럼 심장이 뻥 뚫려있어서 통과해버리는 미스터리한 매력. 그래서 내 눈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빈 껍데기처럼 보였다.




# 4.

미니스커트 미녀인 그녀와 난 퇴근 후, 회사에서 가까운 명동을 가끔씩 같이 다니곤 했다. 쇼핑도 하고 가끔 술도 마시고. 몇 마디만 하고 나머지는 침묵하는 그런 술자리들. 어느 날인가 우리가 잘 가지 않던 명동의 한 술집으로 날 데려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보여줄게”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어두컴컴한 술집으로 들어선 한 남자. 첫인상이 강렬했다. 머리를 민, 거친 수컷의 분위기. 불안하고 어두운 눈빛을 가진 남자는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과 너무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때, 텅 비어있던 그녀의 눈과 차가운 심장에 온기가 차오르는 걸 보게 되었다.


‘아...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그 후배였다. 언젠가 지나가듯 말한 적 있는 그 후배.  '사랑'하지만 서로 '생활'하면 안 맞을 것 같아서 헤어지기로 한 후배가 있다고. 자기를 잊기 위해 그 후배가 외항선을 탔을 때 카메라를 선물로 사주었다고 한 그 남자. 온기가 느껴지지 않던 얼음 미녀인 그녀의 눈빛이 따뜻해지는 걸 봤다. '그녀가 사랑한 유일한 남자'임을 알아차린 나는 혼란스러웠다. 잊으려 애썼으면서도 그렇게 못 잊고 서로에게 진심인데, 헤어지는 사랑이 진짜 사랑인 건가. 사랑하다면서 왜?. ‘미친 사랑’을 안 해본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순간. 그리고 그제야 모두에게 오픈됐다고 착각하게 만든 그녀의 비밀이 풀렸다. 아,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면, 모두 사랑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구나. 그 누구든, 아무라도 상관없을 테니까.




# 5.

그 후,  회사원 생활은 3년 만기 적금을 찾으면서 동시에 종지부를 찍고 퇴사를 하며 난 방송국 작가 생활을 하게 되었고 더 이상 그녀와 연락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점선’ 같던 우리 둘은 누군가 손을 놓으면 다른 손도 저절로 놓아지는 적극적이지 않은 친구였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인가 동기로부터 전해 들은 그녀의 뜻밖의 소식. 그녀를 좋다고 따라다니던 어떤 남자의 청혼을 받고 결혼을 약속했는데, 결혼식을 얼마 앞두고 자살했다는 믿기 힘든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말도 안 돼.'라고 심장이 요동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그녀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 더 크게 들었다. 그녀의 마음속 검은 우물을 못 보았다면 모를까, 겉으로 보이는 그녀의 웃음만 보고 괜찮다 생각할 수 없었다. '사랑'은 하지만 '생활'이 어렵다고 힘들어했어도 그녀의 사랑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과는 생활하는 데서 마음이 맞지 않고
마음이 맞는 사람은 좋아지지 않아요.
애정과 생활은 항상 부딪히고 뭐랄까.
그건 내가 쭉 안고 가야 하는 성가신 병처럼 느껴집니다.

'애정'하는 사람과 '생활'하는 사람은 이토록 다른 것이라며, 애정과 생활이 부딪히는 걸 못 견디겠다던 배두나의 대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그 대사는 '금기사항'이던 그녀의 기억을 '봉인 해제'시키고 말았으니. 몇십 년 만에 그녀를 떠올리고야 말았다.




# 6.

함께한 3년 남짓한 시간. 친하다고 할 수 없는 관계. 하지만 서로 바라는 바 없이 무심해서 가까왔던 친구. 지금도 명동에 가면 가끔 그녀가 떠오른다. 예쁜 얼굴로 미니스커트를 고르던 너. 술이 들어가면 웃음도 많아지고 즐거워지던 너. 사랑은 한 명뿐이었음에도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던 너. 나는 늙어가는데 너의 마지막 모습은 27살 예쁜 모습 그대로겠구나. 분홍 미니 스커트를 입고 술잔을 기울이던 모습! 언제나 내겐 너의 마지막 모습이야. 어쩜 세월이 흘러도 한순간만 남는 거니. 이름 한 번 불러봐도 될까?


윤정! 거기서도 미니스커트 여전해?

너한테 나는 어떤 기억이니? (끝.)


작가의 이전글 점처럼 미워하고, 점처럼 사랑하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