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점처럼 미워하고, 점처럼 사랑하고

<에세이 만드는 법>, 이연실 작가의 그 문장

삶이 불러주는 이야기를 기억 속에서 숙성시켰다가
작가의 손이 자연스레 받아쓰는 글이 에세이다.


<에세이 만드는 법>, 이연실




#1. 수필이 뭐지?

수필을 써가는 숙제가 있었다. 시, 소설은 알겠는데, 수필은 뭐지.  ‘수필’이 뭔지 몰라 끙끙대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아랫집 언니가 책을 많이 읽으니까 알 거라고 물어보라고 하셨다. 엄마 말대로, 아랫집 언니는 책을 좋아하는지 그 집에는 책이 많았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언니가 어려웠지만, 조심스레 물었다.


"수필이 뭔지 몰라서 숙제를 못 하고 있어요. 어떻게 써요?""수필은 일기 같은 거야. 네 마음을 쓰면 돼."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 느낀 수필의 첫인상은 희미한 '일기' 였다. 일기처럼 편하게 내 이야기를 쓰는 글. 그리고 피천득 작가의 책과 몇 권의 책을 빌려온 게 수필과의 첫 만남이다.


 


#2. 그건 옷의 무늬 같은 거

아랫집 언니가 사실은 '마음이 아픈' 상태라는 걸 나중에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알게 되었다. 가끔 예민해진다는 것, 긴장과 스트레스 때문에 학교를 졸업하기 못했다는 것, 가끔씩 발작 증상이 있다는 얘기까지. 아랫집 언니 얘기를 할 때면 어른들은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웠다. 언니가 '마음이 아픈' 사람임을 강조하면서, 언니의 가족들은 더없이 착한 사람들이라는 걸 덤처럼 이야기했다. 언니의 착한 엄마, 그리고 언니 때문에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언니의 여동생. 언니를 빼면 걱정거리가 없는 집이라는 이야기로 마무리되곤 했다.


언니가 아픈 현장을 본 적 없는 나는, 어른들의 이야기에 실감도 나지 않고 안다고 해도 달라질 일이 없었다. 나한테는 '마음  아픈 언니'가 아니라 '수필을 알려주고 책을 빌려준 언니'일 뿐이니까. 그 언니의 전부를 알 수는 없지만, 난 내가 경험한 언니의 일부분만 '무늬'처럼 기억할 뿐이니까.       




#3. 삶이 불러주는 이야기의 받아쓰기

이연실 편집자의 책 <에세이 만드는 법>을 읽으며 어릴 적 '수필'이 무엇인지 알려준 언니가 떠올랐다. 내겐 피천득 선생님보다 먼저 수필 세계에 먼저 입문시켜 준 사람이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은 수필. 그 수필은 세월이 흘러, '수필'이란 낡은 이름 대신, '에세이'라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세련된 이름을 쓰고 있다. 그러다 눈길이 머문 문장 하나.



삶이 불러주는 이야기를 기억 속에서 숙성시켰다가
작가의 손이 자연스레 받아쓰는 글이 에세이다.

수많은 에세이를 책으로 펴내고 히트시킨 편집자이자 작가는, 에세이에 대해 '자기만의 정의'를 내린다. 여태껏 언니가 알려준 정의와 피천득 선생님의 유명한 문장인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와 같이 유려한 글을 에세이로 알고 있었건만, 이 작가는 자신만의 정의를 내린다. 많은 철학가들이 사랑, 행복, 인생, 우정에 대하여 자신만의 언어로 정의를 내리던 것처럼.   


첫 만남에선 아름답게 쓴 글이 에세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삶의 이야기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는 글'이 에세이란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래서 투박해도 자기 인생을 잘 산 사람들의 글에 감동받고 마음이 움직이는 게 아닐까. 때론,  글 쓰는 일이 잔재주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재주 이전에 '삶의 태도'와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이 불러주는 이야기에 먼저 귀를 열고 숙성될 때까지 기다림을 배워야 하는 삶의 태도 말이다.




#4. 점처럼 사랑하고, 점처럼 미워하고

고백하자면, 가끔 좋기만 한 사람을 만나 '홀라당' 빠졌다가 '발라당' 깨질 때가 있다.  나의 기준에 맞춰 좋은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가, 순식간에 '실망'하며 나쁜 사람이나 이상한 사람으로 바뀌어버린 경험. 그 사람이 가짜 같다고 생각되는 실망스러운 기억들.  


명사들을 촬영할 때, 두드러졌던 몇 번의 경험이 떠오른다. 유방암 치료의 권위자인 한 의사 선생님. 지방에서 올라온 유방암 환자들이 찜질방을 전전하는 걸 보고 사비를 털어 전셋집을 마련한 선생님은 나의 '추앙'의 대상이었는데, 얼마 뒤 '실망'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회식자리. 선생님이 좋아한다는 '카스'로 주종을 천하통일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존경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또  '행복'을 강의하는 어느 교수님. 그 흔한 행복을 두루뭉술하지 않게 '데이터'로 조목조목 짚어내는 뇌섹남의 모습에 반했는데 방송을 만들 땐, 연락도 잘 안되고 녹화날 의상을 문제 삼는 모습에 '존경'의  마음이 싹 사리지고 말았으니.    


돌이켜보면, 너무 좋았다가 단점을 발견하고 모든 게 싫어진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을 완벽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혼자 실망해버린 나의 잘못일 거다. 나의 헛된 기대에 혼자 부풀었다 꺼져버린 거지. 그래서 마음을 다시 먹어본다. 누군가 좋다면 그 '점'만 좋아하고, 싫다면 그 싫은 한 '점'만 미워하자고. 전부를 미워하거나 전부를 미친듯이 사랑하지는 말자고. 어릴 적 기억 속의 그 언니를 보며 남들이 말하는 '마음 아픈' 언니가 아닌, 내게 수필이 무엇인지 알려준 '한 점'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5. 글은 삶으로 쓰고, 손으로 받아 적고

이연실 작가의 <에세이 만드는 법>을 읽으며  어릴 적 언니를 다시 소환해본다.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내 마음을 쓰는 게 수필이라고 알려준 언니의 추억과 한 권의 책을 만나 '글은 삶의 받아쓰기'라는 기본기를 새롭게 배운다.   


'욱'하는 마음으로 전부를 부숴버리지 말아야지. 또, 좋다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색으로 전체를 물들이지는 말아야지. 뭐든 쉽게 판단하고 싶은 마음을 참는 마음. 점처럼 사랑하고 점처럼 미워하는 마음이 되자고... 글은 삶으로 쓰고, 손은 그저 불러주는 이야기를 받아 적는 일이니까. (끝.)

 












작가의 이전글 공격수와 수비수, 당신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